[조선의 걸크러시]〈22〉정치 감각도 탁월한 ‘내조의 여왕’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2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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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대략 글자를 볼 줄 아는데 조보(朝報)의 정사(政事)를 보는 게 재미있대요. 우리 고을에 오는 조보를 좀 빌려다 주세요.” ―‘동패낙송’ 중에서

조보란 조정의 소식을 알리는, 국가에서 발행한 신문으로 정치 소식 및 관리들의 인사 발령을 알 수 있었다. 조보는 지방 관리 및 중앙정치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그런데 조정의 정치와 인사 동정에 큰 관심을 가진 여성이 있었다.

황해도 평산에 우하형이라는 이가 있었다. 그는 가난한 무관으로 평안도 압록강 변 어느 고을에서 근무하다 관아 소속의 잡일을 하던 한 여자와 함께 살게 됐다. 우하형은 여인에게 기대하는 바가 없었다. 객지의 고단한 신세였기 때문에 소소한 잡일을 부탁하고자 했다. 그러나 여인의 생각은 달랐다. 소소한 가사는 기본이고 우하형을 위해 보다 더 중요한 일을 찾고 싶어 했다. 여인은 우하형의 임기가 끝나 떠나게 되자 자존감이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는 그에게 사회적 지위에 대한 욕망을 자극한다.

“제가 선달님의 관상을 보니 결코 출세하지 못할 분이 아닙니다. 나중에 무관(武官) 한자리는 충분히 얻을 것입니다. 제가 평생 모은 은자 600냥으로 말과 의복을 마련해 상경한 후 일을 도모해 보세요.” 여인은 뛰어난 감각으로 우하형의 잠재력을 알아차렸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경제력을 동원해 지원했다. 여인은 우하형과 정식으로 혼인한 것이 아니어서 당장 그와 함께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하형은 여인의 사리판단이 밝은 것에 감동하는 한편 서글픈 마음으로 훗날을 기약하며 떠났다.

여인은 경영에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우하형과의 훗날을 위해 의지할 곳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 홀아비로 지내는 장교를 선택했다. 이 장교 역시 여인의 현명함을 알고 후처로 삼고 싶어 했다. 여인은 장교 집안의 재산 현황을 꼼꼼하게 정리해 장부를 만들었고, 이 집안의 재산은 날로 늘었다. 여인은 장교에게 조보 대여를 부탁해 정부의 인사 동정을 꼼꼼하게 관찰하고 있었는데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조보에서 우하형의 이름을 찾았다. 여인은 장교에게 애초부터 오랫동안 같이 살 생각이 없었음을 밝히고 작별을 고한다. 또한 자신이 처음 살림을 맡으며 받았던 문서와 현재 재산 장부를 비교하면서 재산이 늘었음을 확인시켰다. 자신을 보호해 준 장교에게 은혜를 갚았다는 생각에 당당한 마음으로 떠날 수 있었다.

여인은 뛰어난 정치적 감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장교와 작별하고 우하형을 찾아갔다. 이때 우하형은 부인이 죽어 혼자였으므로 그를 아내로 맞았다. 그는 우하형이 구입해 오는 조보를 통해 중앙정부 권력의 흐름을 꿰뚫고 있었다. 그래서 우하형으로 하여금 벼슬을 맡게 될 관원과 미리 친분을 쌓도록 하니 이후에 벼슬을 맡은 관리는 우하형을 극진히 대접했다. 우하형의 미래는 탄탄해졌고, 절도사에 이른다.

세월이 흘러 우하형이 생애를 마치자 여인 역시 방에 들어가 곡기를 끊고 숨을 거둔다. 사람을 알아볼 줄 아는 식견 그리고 경영능력, 정치 감각을 두루 갖춘 우하형의 후처는 자신에게 주어진 불리한 상황에서도 최선의 선택으로 최고의 결과를 만들어 냈다. 바야흐로 ‘내조의 여왕’이었다.
 
임현아 덕성여대 언어교육원 강사
#동패낙송#우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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