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환교수의 법과 영화사이]<크레이 머 대 크레이머>

  • 입력 2001년 2월 20일 16시 53분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 >(1979)

감독: Robert Benton/출연: Dustin Hoffman, Meryl Streep/원작: Avery Corman

만날 때부터 미리 헤어질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만남도 헤어짐도 인생의 다반사이다.

부부가 이혼하면 '함께 이루었던' 것을 나누어야 한다. 함께 이룬 재산을 나누는 일은 비교적 간단하다. 따지고 보면 그것은 산술의 문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부부가 혼인중에 이룬 재산은 누가 벌었든지 무관하게 배우자가 절반을 소유한다는 '부부공동재산'(community property)이라는 개념도 산술을 용이하게 하게 위해 고안한 제도이다.

그러나 함께 이룬 인적 재산인 자식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는 문제는 어렵다. 그것은 재산이 아닌 인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영화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Kramer v Kramer) 는 남녀평등의 시대를 사는 현대인에게 공통된 문제를 제기하는 수작으로 모든 양육권 소송 영화의 원조로 인식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1979년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이기도 한 이 영화는 60년 대 이래 맹렬하게 전개된 여성운동의 성과가 가정에 미치는 새로운 문제에 대한 찬찬한 성찰을 요구하는 작품이다.

치열한 경쟁의 마당인 광고회사의 중역, 테드 크레이머는 아내 조안나와 여섯 살 짜리 아들 빌리에게 신경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 그는 가사와 육아는 아내의 몫이라고 믿는 평범한 가장이다. 어느 날 갑자기 조앤너가 결별을 선언한다. '자신의 길'을 찾아 가정을 떠나겠다는 것이다. 테드로서는 청천벽력, 실로 기막힌 일이나 결혼 때문에 직장을 그만둔 아내로서는 6년간의 결혼생활이 굴욕의 세월이었다는 것이다. 고통과 당황 속에 테드는 프렌치 토스트 요리법을 배우고 어린 아들과의 사이에 신뢰의 가교를 건설한다.

1년 반, 힘겹게 새로운 질서를 구축한 시점에 조앤너가 나타나 아이의 동거 양육권을 요구하며 소송을 제기한다. 법정에서 공방전이 벌어지고 둘은 서로 상대가 양육자로서 부적합하다는 증거를 경쟁적으로 제출한다. 변호사의 가중된 승부욕 때문에 서로에게 아픈 약점들이 노출된다. 테드의 부주의로 아이가 다친 일, 조안나에게 애인이 생긴 일 등이 여과 없이 드러난다.

육아 때문에 직장을 잃은 테드는 경제적 능력에서도 '여자'에 뒤지는 수모를 겪어야 한다. 판사는' 미성숙 연령'(tender years) 의 아동의 복지를 위해 어머니의 품이 최선이라는 기본 공식을 고집한다. 소위 'tender years rule'로 불리는 이 원칙은 '생래적 모성'이라는 신화가 인간사회의 경험칙으로 인정되어 미국전역의 법원에 걸쳐 널리 수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영화가 제작될 당시인 1970년 대 말에는 이 원칙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오늘날에는 이미 '원칙'의 지위를 잃었다. 특수한 양육자로서의 애정과 자질에 있어 남성과 여성 사이에 생래적으로 다른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남녀평등' 사회의 또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어쨌든 판사는 조안나에게 동거 양육권을 부여하고 테드에게는 양육비의 지급의무와 함께 정기적으로 아들을 방문할 권리만을 준다.

별거 또는 이혼 상태의 부모에게 애인이 있느냐는 질문은 한때 양육권 소송에서 전형적으로 등장하는 질문이었다. 생부모 중의 한 사람이 육친이 아닌 이성과 애정관계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아동의 정서적 안정에 중대한 타격을 준다는 추정이 가능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러한 종래의 법적 원칙도 마찬가지로 한때의 경험칙에 불과하다. 헤어짐과 만남이 일상의 다반사이고 성인 남녀의 만남에 육체가 따르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런 일아라는 것이 법이 수용한 새로운 경험칙이다. 그리하여 구체적인 상황에서 아동의 정서에 해악을 미치는 방법으로 성행위를 하는가의 문제로 귀착한다.

미국의 법원에서는 무엇이 '아동의 복지'를 위해 최선인지를 배심이 아닌 판사가 결정한다. 또한 동거양육의 문제는 상황의 변화에 따라 신축성 있는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소위 "계속관할권"을 보유한다. 그래서 가정법원(family court)의 판사는 수시로 병세를 진찰하여 처방을 내리는 가정의(family doctor)에 비유된다.

부자가 생이별을 준비하는 과정이 관객의 손수건을 적시게 한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을 설득하는 아버지도 이를 아픔으로 수용하는 어린 아들도 진한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다. 새로운 모자관계에 애로를 느낀 조안나가 테드를 아버지에게 되돌려주는 것으로 영화는 종결된다.

이 작품은 사회와 직장 등 공적영역은 남성의 무대이고, 여성은 가정이라는 사적 영역에 머물러야 한다는 종래의 윤리가 무너지면서 생기는 사회적 공백을 조명한다. 소설 '아버지'와 '가시고기' 등 몇몇 고성능 부성(父性) 최루제가 시류를 타는 나라, 부부가 헤어지면 원수 아니면 영원히 불편한 타인이 되는 나라의 부모들에게 깊이 생각할 거리를 제공하는 영화이다. 무엇이 '자녀의 복지'를 위해 최선인가라는 영원한 숙제와 함께.

<서울대 법대 교수> ahnkw&plaza.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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