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박물관 100년의 사람들]<1>진홍섭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3월 12일 02시 59분


국립박물관 개성분관 초대 관장을 지낸 진홍섭 옹은 격동기 한국 박물관의 역사와 함께했다. 김경제  기자
국립박물관 개성분관 초대 관장을 지낸 진홍섭 옹은 격동기 한국 박물관의 역사와 함께했다. 김경제 기자
<1>진홍섭 국립박물관 개성분관 초대 관장
“신라금관 6·25때 美피란… 모조품 도난소동도”
인터뷰=이원복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실장

《1909년 순종이 세운 창경궁 제실박물관에서 시작된 한국박물관 역사가 올해 100년을 맞는다. 오늘날 전국 박물관은 600여 곳. 현재 국립 박물관을 이끄는 후배들이 원로 선배 10명의 육성 증언을 통해 한국박물관 100년의 역사와 길, 박물관이 당대 문화에 미친 영향을 듣는다. 국립중앙박물관과 동아일보의 공동 기획으로 한국박물관의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리는 ‘한국박물관 100년의 사람들’을 10회 연재한다.》
한국 박물관 관련 생존 원로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진홍섭 옹(91)은 인터뷰 내내 이원복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55·사진)의 질문이 잘 들리지 않는 듯 수차례 손을 귀에 가져다 댔다. 하지만 기억에서 끄집어낸 격동기 한국 박물관의 역사는 또렷하고 생생했다.
진 옹은 광복 직후 최초의 국립박물관 개성분관장(1947∼52년)을 맡았고 6·25전쟁 중 부임한 경주분관장(1952∼61년), 이화여대박물관장(1964∼83년)까지 박물관에서만 36년을 보냈다. 그가 국립박물관에 있었던 시기 한국 사회는 광복, 6·25전쟁의 격변기였다.
▽이원복=국립박물관의 초대 개성분관장이셨습니다. 개성은 이제 자유롭게 갈 수 없는 곳이어서 당시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진홍섭=일제강점기 개성의 여학교 교사를 지냈습니다. 일제를 찬양하지 않았지만 광복 뒤 교사를 계속하는 것이 양심상 어려워 1946년 사표를 냈는데 김재원 초대 국립박물관장(1909∼1990)과 국어학자 이희승 선생(1896∼1989)이 찾아와 관장 직을 제의했어요. 분관은 난방비가 없어 화로 하나로 한겨울을 보낼 정도였죠. 하지만 고려 수도였던 개성의 국립박물관은 고려 문화의 정수를 소개하는 대표 박물관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서울 국립박물관에 ‘떼를 써’ 고려청자를 거의 다 가져왔어요. 매우 빈약했던 박물관이 ‘고려 문화 보려면 서울이 아니라 개성을 가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위상이 변했지요.
6·25전쟁 발발 1년 전 북한군의 한국군 고지 습격으로 시작된 개성 송악산 전투의 소용돌이에 개성분관이 휘말렸다. 박물관이 북한군 야포의 사정거리에 들었던 것. 고려청자와 주요 유물을 황급히 서울로 옮겼고 개성분관은 문을 닫았다. 전쟁 중에도 진 옹은 텅 빈 박물관을 지켰다. 1950년 중공군 참전으로 전세가 밀리자 박물관 건물은커녕 목숨마저 지킬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진 옹은 국립박물관의 피란처가 있던 부산으로 떠났다.
▽이=당시 부산 박물관 상황은 어땠습니까.
▽진=관세청 창고를 빌려 간신히 유물을 보관하는 정도였습니다. 서울에서 황급히 내려왔으니 유물을 제대로 포장할 겨를도 없었겠죠. 유물을 신문지로 돌돌 말아 사과 궤짝에 담았더군요. 나중에 국보 중의 국보가 될 유물도 있는데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전 직원이 총동원돼 유물을 유물상자에 정식으로 다시 포장했습니다.
▽이=그 상자도 9월에 열리는 박물관 100주년 특별전에 전시할 유물감인데요.(웃음)
이 유물상자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다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진 옹은 김재원 관장의 제의로 1952년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장으로 갔다. 당시 중요 유물은 성덕대왕신종(국보 29호·국보 지정은 1963년부터 이뤄졌다)과 백률사 금동불상(국보 28호)밖에 없었다. 신라를 상징하는 금관총 금관(국보 87호), 금령총 금관(보물 338호), 서봉총 금관(보물 339호)은 없었다. 금관이 어디로 사라진 걸까.
▽진=6·25전쟁을 피해 미국으로 보냈어요. 관람객들이 “금관을 보러 왔는데 없으니 관람료를 물어내라”고 아우성이어서 모조금관을 만들어 전시하기로 했습니다. 서봉총 금관의 실측도를 바탕으로 영락(구슬을 꿰어 만든 장신구)과 곡옥(옥을 반달 모양으로 다듬은 것)까지 그대로 재현했지요. 금관의 입화장식(꽃잎을 세운 것 같은 장식)이 흐늘거리며 서지 않기에 금관 테두리에 점을 연속적으로 찍었더니 똑바로 섰습니다. 1956년 모조금관을 진품으로 잘못 알고 훔쳐가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일제강점기에도 금관을 도난당했다가 ‘신라 금은 지금 금과 달라 금관을 부숴 다른 걸로 만들어도 금방 탄로 난다’고 신문에 써 금관을 되찾은 계교(計巧)를 똑같이 해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도둑이 모조금관을 냇가 모래에 파묻고 달아났더군요.
개성분관은 광복 이후 6·25전쟁 전까지 고려청자의 보금자리였다. 1947년 국립박물관 개성분관이 되기 전 개성부립박물관의 전경(위).  1952년 국립박물관의 부산 피란 시절 회의 모습. 왼쪽이 진홍섭 옹. 왼쪽에서 세 번째가 최순우(1916∼1984)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네 번째가 고고미술가 임천(1908∼1965), 가운데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인물이 김재원 초대 국립박물관장, 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고고학자 김원룡(1922∼1993)이다. 사진 제공 국립중앙박물관
개성분관은 광복 이후 6·25전쟁 전까지 고려청자의 보금자리였다. 1947년 국립박물관 개성분관이 되기 전 개성부립박물관의 전경(위). 1952년 국립박물관의 부산 피란 시절 회의 모습. 왼쪽이 진홍섭 옹. 왼쪽에서 세 번째가 최순우(1916∼1984)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네 번째가 고고미술가 임천(1908∼1965), 가운데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인물이 김재원 초대 국립박물관장, 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고고학자 김원룡(1922∼1993)이다. 사진 제공 국립중앙박물관
▽이=2004년 어린이박물관이 50주년을 맞았습니다. 선생님께서 만드신 경주 어린이박물관학교가 효시입니다.
▽진=경주 어린이들이 유적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경주 유적을 살리려면 어린이부터 교육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박물관 유물을 일일이 촬영해 슬라이드를 만들고 이를 서울에서 빌린 환등기로 보여줬습니다. 미국 공보원에서 영사기를 빌려 당시 제작된 ‘문화영화’까지 상영하니 아이들이 하나둘씩 불어났습니다.
진 옹은 1957∼59년 미국에서 열린 ‘한국 고대문화전’의 관리관으로 1년간 미국에 파견돼 외국인들이 한국 문화에 얼마나 무관심한지 절감하기도 했다.
▽진=금관총, 금령총, 서봉총 금관 3개를 나란히 전시했는데도 외국인들은 금관보다는 외국의 다른 박물관에서 가져온 중세기 유럽 갑옷만 쳐다보더군요. 형태가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청동기시대 토기와 조선시대 도자기를 나란히 진열한 것도 봤습니다. 우리가 오랜 역사의 문화국가라는 걸 알릴 수 있는 기회였지만 아직 갈 길이 멀었던 것이죠.
진 옹은 이화여대박물관장 시절부터 한국 미술사의 방대한 자료를 한데 모은 ‘한국미술사자료집성’을 잇달아 펴냈고 “대학 박물관의 유물은 대학생의 교재”라는 신념으로 대학 박물관 발전에 기여했다. 그럼에도 한국 박물관 발전을 위한 조언을 부탁하자 손사래를 쳤다. “늙어빠진 머리의 안목으로 하는 얘기는 구세대적”이라는 겸손이었다.
정리=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공동기획:동아일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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