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마을 현장을 가다 7]美 애리조나주 '아르코산티'

  • 입력 2002년 8월 7일 18시 15분



《동이 트자마자 주물공장의 화덕에 불이 피어오른다. 활활 타올라 섭씨 1300도까지 올라간다. 한쪽에선 그라인더(연마기)가 요란하다. 젊은이 5명이 화덕에서 청동과 자기(瓷器)를 굽는다. 화덕에서 꺼낸 청동과 자기를 헝겊으로 덮어두었다 식히면 바람에 흔들려 영롱한 소리를 내는 풍경(風磬·windbell)들이 나온다. 7월24일 사막의 아침. 미국 애리조나주 어퍼 소레나 사막 한가운데에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마을이 솟아 있다. 아르코산티(Arcosanti).》

▼33년째건설중…모래위의‘환경도시’▼

주물 만드는 젊은이들 - 홍은택기자

시사주간지 뉴스위크가 76년 8월16일자에서 “아마 우리가 사는 동안 가장 중요한 도시건축 실험이 될 것”이라고 했던 아르코산티는 70년 첫 기공 이후 인구 5000명을 수용하는 도시를 목표로 33년째 건설되고 있다.

건축가이자 이상주의자인 파울로 솔레리가 50년대 말부터 만들어내기 시작한 이 풍경들의 로열티는 아르코산티의 건설비용으로 들어간다.

사람들은 섭씨 44도의 불볕을 피해 일찍 일을 시작한다. 주물공장 위에 자기공장이 있다. 캐서린(18·여)은 자기의 표면에 무늬를 새기고 있다. 그의 집은 주물공장 한편에 있는 조그만 방이다. 문만 열면 바로 공장이다. 이곳의 즐거움은 집 찾기. 숨은 그림처럼 4층짜리 방문객 센터의 1층, 주물공장의 2층, 사무실의 서쪽 벽, 도서관 동쪽 벽 등지에서 침실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이곳은 솔레리씨의 아르콜로지(arcology)에 따라 작업과 주거, 그리고 문화 상업 공간을 혼합한 도시를 건설하고 있는 중이다. 아르콜로지는 건축(architecture)과 생태학(ecology)을 합성한 말. 단순한 자연친화적 건축이 아니라 땅과 자원을 최대한 아껴 쓰는 도시설계의 신개념이었다. 교통 비용이 전혀 들지 않는 공동체. 사막은 그런 점에서 솔레리씨의 이상적인 실험장소다. 사위(四圍)가 사막이어서 모든 기능이, 그것도 아름답게 갖춰져야 한다.

이곳에서는 차가 필요 없다. 면적은 15에이커(1만8000여평). 인구 5000명의 미국 마을이 5000에이커쯤 된다고 하니까 얼마나 오밀조밀하게 밀집해 있는지 알 수 있다. 솔레리씨가 가장 경멸하는 것은 미 중산층이 사는 교외. 교외는 공간을 잡아먹고 교통에너지를 낭비하는 동시에 공동체를 파괴한다는 것.

캐서린은 오전 6시에서 오후 2시까지 일한다. 여기서는 주당 40시간을 일한다. 그는 아르코산티의 첫 2세대다. 고교시절을 빼곤 줄곧 이곳에서 태어나 자라났다. 캐서린은 9월 명문사립대인 스탠퍼드대에 진학한다. 그는 “온갖 사람들과 뒤섞여 지내는 게 가장 즐겁다”고 말했다.

그의 어머니 매리 호들리(57)도 스탠퍼드대 출신이다. 대학 졸업 후 이곳에 와 첫 삽을 뜨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떠나지 않았다. ‘아르코산티의 영혼’으로 불리는 호들리씨는 재정을 책임지고 있다. “처음엔 5년 만에 도시를 건설하고 세계를 구하러 나갈 것 같았다”며 활짝 웃는 얼굴에 세월의 연륜은 있지만 구김살은 없다.

그러나 아르코산티의 공정은 불과 3%에 불과하다. 마치 우공(寓公)이 산을 옮기는 속도다. 콘크리트만 쏟아 붓는 식이라면 진작 도시가 세워졌을 것이다. 그는 “교육적인 가치를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르코산티는 지금까지 5주짜리 워크숍에 참여한 실습생 5000여명이 건설한 것이다. 워크숍 담당 와츠(28)는 “완성된 도시를 보고 싶지만, 전보다 나아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고 말했다.

실습생들은 수업료(약 110만원)도 낸다. UC버클리대 출신의 세드(22)는 ‘아르콜로지를 배우기 위해’, 공중조기경보기(AWACS) 조종사 출신의 에릭(41)은 ‘솔레리의 철학에 감명을 받아’ 워크숍에 참가했다.

이미 공동체가 형성됐다. 워크숍 참가자 20명, 주민 55명, 자원봉사자 10명 등 모두 85명. 주민이 되려면 워크숍을 거쳐 이곳에서 일자리를 구해야 한다. 일자리가 없으면 자원봉사자다. 주민은 한 달에 집세를 포함, 110달러(약 13만원)만 낸다. 대신 월급도 시간당 최저임금 5.5달러를 크게 넘지 않는다. 관광가이드를 맡고 있는 그레거(48)는 “월급이 1000달러(약 120만원)밖에 안 되지만 돈 쓸 일도 그만큼 적다”고 말했다.

이들은 복합적 관계를 맺어가고 있다. 직장 동료가 퇴근하면 함께 사는 가족이고 문화생활을 영위하는 동네 친구다. 뮤직센터와 원형극장 도서관 등이 몰려 있기 때문에 동선이 얽히면서 관계도 끈끈해진다. 젊은이들에게는 밤마다 파티를 여는 ‘사막의 천국’이다.

전망 좋은 방은 오래 거주한 사람 순으로 배정된다. 76년에 와 가장 좋은 방을 쓰고 있는 일본인 건축가 도미아키 다무라(51)는 “처음엔 텐트를 치고 살았다”며 “사막 저 건너편에 있는 풍요로운 소비사회를 마다하고 고생을 사서하는 여기 미국인들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고 말했다.

아르코산티는 이미 자족적인 도시다. 연간 예산은 80만달러(약 9억6000만원). 연간 5만명의 관광 수입에다 기금 150만달러의 운영수입, 풍경의 로열티 등으로 굴러간다.

연간 강수량 280㎜ 미만의 사막이지만 브래드셔 마운틴(서쪽)과 마자트잘 마운틴(동쪽)에서 흘러내린 빗물이 지하에 풍부히 고여 있어 지질학적으로도 축복받은 곳이다. 주민들은 아르코산티 자체가 21세기 생태도시(ecocity)를 싹틔우는 저수지가 되길 기대하고 있다.

▼도시설계자 파울로 솔레리 인터뷰▼

파울로 솔레리(83·사진)는 아직도 이상주의에 불타는 청년이었다. 그는 자전거와 수영으로 체력을 다지고 있으며 철학에 관한 책을 집필하고 있다고 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모국 이탈리아가 아닌 미국에서 실험하는 이유는….

“47년 이곳은 새로운 실험에 훨씬 관대한 문화였다. 지금 상황은 보다 빡빡해졌지만.”

-사막에 도시의 터를 잡은 이유는….

“여기서 도시를 세울 수 있으면 어디서도 도시를 건설할 수 있다.”

-단지 도시가 아니라 인간관계의 실험인 듯하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악기를 만든다. 어떤 음악을 연주하느냐는 사람들에게 달려 있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1만년 전부터 공동체의 문화를 체득하고 있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노령인데, 살아서 아르코산티의 완공을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난 서두르지 않는다. 아르코산티는 내가 죽어서도 계속될 미래를 향한 아이디어와 비전이다.”

-압축적이고 밀집된 모델은 국토가 좁은 한국에 적합한가.

“하지만 한국은 미국을 닮으려고 한다. 잘못된 생각이다. 한국적인 모델을 개발해야 한다. 현재의 세계화는 탐욕에 의해 추동되는 잘못된 트렌드다. 탐욕이 아니라 검소함과 자연과의 친화력을 감안하는 도시 개발이 이뤄져야 한다.”

-하지만 한국만이 아니지 않은가.

“하루빨리 사람들이 잘못을 범하고 있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그 깨달음이 없으면 세계는 파국으로 가게 된다.”

-그렇다면 미래에 대해 회의적인가.

“단기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나는 인류의 미래에 대해 낙관적이다.”

-지금까지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작품은….

“아르코산티다.”

-세계적으로 공동주거(cohousing)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공동주거는 핵가족적인 모델은 그냥 두고 주거만 합치는 것이다. 건축생태학의 한가지 측면만 반영하는 것이다.”

▼파울로 솔레리는…▼

파울로 솔레리는 선지자적 건축가로 명망이 높다. 1950년대에 이미 환경친화적이고 공간효율적인 생태도시를 구상한 그는 이를 건축생태학(arcology)의 개념으로 발전시켜 아르코산티에 적용했다.

지구인구가 증가하는 데다 미국이 엄청난 자원을 낭비하는 소비생활을 주도하고 있고 전 세계의 중산층이 이 같은 삶을 추종함으로써 2050년에는 지구가 50개가 있어도 모자랄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는 게 그의 확신.

1919년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태어나 토리노공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47년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미국인 스승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건축물 단위의 생태학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데 실망, 49년부터 독창적인 길을 걸어왔다. 그는 풍경(風磬)을 개발해 엄청난 부를 쌓을 수 있었으나 모든 재산을 아르코산티 건설에 쏟아붓고 있다. 63년에는 미 건축가협회로부터 ‘올해의 장인(Craftsman)’으로 선정됐고 2000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는 미술과 건축에 평생을 헌신한 공로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96년 일본정부의 의뢰로 높이 1000m짜리 하이퍼 빌딩을 설계해 화제가 됐다.

▼아르코산티 가는 길▼

미국의 그랜드캐니언을 관광하는 길에 아르코산티를 방문해볼 만하다. 17번 고속도로를 타고 차로 두 시간반 남하하는 거리다. 아르코산티에 묵는 것은 사막 한가운데서 밤을 보낼 수 있는 좋은 기회. 침대 하나짜리 방에서부터 침실 2개와 응접실 목욕탕 등이 딸린 스카이 스위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숙박료는 20∼75달러 수준. 스카이 스위트는 2주 전 예약 필수. 문의 미국 928-632-7135

아르코산티(애리조나주)〓홍은택기자 eunta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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