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슬로모션]회의실에 걸린 ‘茶山의 글’ 보기 부끄러워…

  • 입력 2004년 12월 13일 17시 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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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 3층 법제사법위원회 회의실. 열린우리당의 국가보안법 폐지안 상정을 막기 위해 한나라당이 8일 밤부터 ‘점거 농성’을 하고 있다. 14일이면 1주일째 철야 농성이 계속되는 셈이다. 13일에도 열린우리당 법사위 간사인 최재천(崔載千) 의원은 “문을 열어라”고 요구했지만 한나라당 농성자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열린우리당은 조만간 법사위 회의장을 다른 곳으로 옮기겠다고 벼르고 있다.

한나라당 의원들의 표정은 비장하기까지 하다. 소속 의원을 지역별(서울-수도권-강원-충청, 대구-경북, 부산-경남)로 나눠 하루씩 회의실을 지키는데 아직까지 불참자가 거의 없다고 한다.

각 조는 다시 두 개 ‘소조’로 나뉘어 제1소조는 오전 8시부터 오후 8시까지, 제2소조는 오후 8시부터 밤을 새워 다음날 오전 8시까지 지킨다.

이혜훈(李惠薰) 의원 등 일부 여성 의원들까지 밤샘 농성을 자청했다.

‘근무 태도’가 느슨해질 낮 시간에는 지도부가 나서기도 한다. 13일 오후에는 김덕룡(金德龍) 원내대표가 위원장 주변에서 이재오(李在五) 의원 등과 함께 자리를 지켰고, 정병국(鄭柄國) 이재웅(李在雄) 의원 등 20여 명이 신문을 보거나 밀린 잠을 자며 함께했다.

이 바람에 근엄하던 법사위 회의실 분위기가 변하고 있다. 13일 찾은 회의실에는 어지럽게 배치된 의자와 책상 위에 먹다 남은 생수통과 사과 귤 등 과일이 널려 있었다.

크래커나 초콜릿 등 간식이 담겨 있는 상자도 뒹굴고 있었다. 회의실로 들어서는 3개의 문 중 맨 뒷문은 책상을 끼워 놓는 바람에 일부 파손돼 있었다.

농성 장기화에 따른 불만도 새어 나온다. 두 번 밤을 새운 한 초선 의원은 “처음에는 도시락을 시켜 먹었는데 이제는 돌아가며 나가서 먹는다”며 “연말이라 지역구 행사도 챙겨야하는데 곤혹스럽다”고 토로했다. 무엇보다 큰 걱정은 이번 농성이 ‘민생을 팽개친 정쟁’으로 비치는 것이다.

한 중진 의원은 법사위 회의실 뒷면에 걸린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선생의 흠흠신서(欽欽新書) 서문을 가리키며 “국민들에게는 미안하다”고 토로했다.

서문에는 “…비참함과 고통으로 울부짖는 백성의 소리를 듣고도 구제할 줄 모르니 화근이 깊어진다”고 쓰여 있다.

이승헌 기자 dd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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