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칼럼]박성희/뉴스와 루머 사이

  • 입력 2004년 5월 6일 19시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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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 조선인들이 앓던 병 중에는 ‘소문’이라는 병도 있었다. 개항 후 밀려온 이방인들과 낯선 문명은 당시 조선 땅을 흔들던 크고 작은 정변과 얽혀 뜬금없는 이야기들을 일구어냈다. 1886년 무렵 서울에서 ‘외국인이 어린이를 잡아먹는다’는 소문이 돌자 민중의 공격을 우려한 외국인들이 외출을 삼가고 최신식 리볼버 권총으로 무장한 자위대를 구성했다는 기록이 있다. 사진기에 찍히면 혼이 빠진다는 소문은 그래도 나은 편이다. 서양인들이 아이들을 잡아 눈알을 빼내어 사진기에 단다는 둥, 여자의 가슴을 도려내 우유를 짠다는 둥, 온갖 해괴한 소문들이 횡행했다.

▼한국언론 ‘필터’역할 하고 있나▼

소문은 정보에 대한 수요와 공급이 맞지 않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궁금증은 꼬리를 무는데 이를 해소할 정보나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기형적으로 자라는 것이 소문이다. 인기 연예인이나 권력층 주변에 소문이 무성한 것은 그만큼 그들에 대한 정보 욕구가 크다는 뜻이다. 소문의 당사자가 되기 싫으면 스스로 열심히 정보를 공개하거나 관심권 밖으로 나가 있으면 된다. 관심 없는 곳에는 소문도 없다.

언론이 제구실을 하면 소문이라는 병균도 맥을 못 춘다. 언론은 사람들이 스스로 어두움과 폭정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가동시킨 자구 시스템이라는 빌 코바치의 분석은 그런 점에서 설득력이 있다. 개화기의 정보 욕구가 근대적 언론의 탄생으로 이어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언론이 자유롭지 못했던 과거 독재정권 시절에는 뉴스가 간혹 소문의 탈을 쓰고 돌아다니기도 했다. 소위 ‘유비(유언비어)통신’이 그것이다. ‘유언비어’의 뜻을 묻는 외국인에게 한 언론인이 ‘true story(진짜 이야기)’라고 번역해 주었다는 일화가 있는데, 그 역시 확인할 길이 없는 소문일 뿐이다.

개화기의 혼돈과 독재 시절의 어두움이 사라진 지금, 사람들은 여전히 소문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주체할 수 없이 많은 정보가 온라인과 오프라인에 넘쳐나면서 뉴스의 영역 또한 재편되는 느낌이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정보가 넘칠수록 진짜를 걸러내는 언론의 역할이 더욱 절실해질 것이라고 했는데, 한국 언론이 과연 그런 필터 역할을 하는지 회의적이다.

특히 최근 북한 용천에서 일어난 폭발사고는 실체적인 진실 접근이 힘든 사건이다. 위성사진이 동원되고, 중국 단둥에 급파된 특파원들이 국경 넘어 흘러오는 온갖 소문과 관측을 열심히 보도했지만, 보도 당시 용천 현장에 있었던 언론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북한 당국이 공개한 신의주의 병원과 천막촌 사진, 조악한 동영상과 파편적인 목격담이 뉴스의 주재료들이었다. 그 빈약한 재료를 갖고 우리 언론은 연일 관련 보도를 쏟아냈다. 뉴욕 타임스가 그걸 보고 ‘한국 언론의 특종능력이 경이롭다’고 한 건 칭찬이 아니다.

북한은 직접 취재가 되지 않는 땅이다. 언론은 최선을 다할 뿐이다. 최선을 해도 모르는 건 모른다. 용천사고 보도는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한국 언론의 병을 드러낸 극단적인 사례일 뿐, 유사한 경우는 국내 보도에도 많다. 조각 퍼즐이 맞지 않으면 그냥 놔두면 될 것을, 억지로 꿰어 맞춰 어떤 그림을 만들어야 한다는 신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한국의 언론이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신문과 방송이 놀랍게도 일치한다.

▼정보 넘칠수록 眞性뉴스 찾게돼▼

언론은 보고 들은 만큼만 보도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취재된 정보에 의견을 섞지 않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리고 소문을 뉴스로 포장하지 않는 훈련이 필요하다. “단둥의 한 소식통에 따르면 북한이 현재 이러이러하다”가 아니라 “그 소식통은 이러이러하다고 했으나 아직 사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건 정보화시대에 언론이 살길이기도 하다. 먹을거리가 풍성해질수록 재료의 원산지나 첨가물 여부를 따지는 것이 어찌 식탁에서뿐이랴. 미확인 정보가 넘치면 넘칠수록, 사람들은 진성(眞性)재료로 뉴스를 가공하는 언론을 찾을 것이다. 건강한 식탁은 좋은 재료에서 나온다.

박성희 객원논설위원·이화여대 교수·언론학 shpark1@ewh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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