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영 칼럼]“생리대가 아닌 집값·환율 잡아야”

  • 동아일보

대통령 생방송 업무보고 흥행에도
핵심 의제 외면해 지지율 하락세
“투명한 국정운영 실현”하려면
국회·언론 질문에 성실한 답부터

이진영 논설위원
이진영 논설위원
지금껏 이런 대통령 업무보고는 없었다. 2주간의 업무보고를 생방송으로 진행한 것도 처음이고, 업무보고 영상들이 ‘대통령, 심각한 표정으로 긴급 지시’ 같은 쇼츠로 제작돼 온라인 공론장을 주도한 것도 처음 있는 일이다. 김민석 총리는 “이재명 대통령이 새로운 장르를 하나 만드셨다. 넷플릭스보다 재미나는 잼플릭스”라고 했다.

듣고 보니 잼플릭스엔 대중문화의 고전적 흥행 요소가 곳곳에 들어 있다. 기초와 광역 단체장, 국회의원을 두루 거친 ‘행정 천재’가, 19부 5처 18청 7위원회 등 228개 공공기관을 ‘도장깨기’ 하듯 돌면서, 무사안일에 빠진 철밥통들을 흔들어 깨워 함께 성장한다는 서사부터 그렇다. 예측 불가의 대통령 질문에 누구는 죽고 누구는 살아남는 전개는 ‘오징어 게임’ 같은 긴장감을 준다. 답변이 부실한 기관장은 “써준 것만 읽는다” “도둑놈 심보”라며 공개 모욕을 당했는데 그 수위가 아침 드라마의 맵디매운 ‘김치 싸다구’ 수준이다.

생방송 업무보고의 흥행으로 이 대통령의 국정 장악력이 커졌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갤럽과 리얼미터의 이달 3주 차 여론조사 결과 대통령의 국정 수행 지지율 반등은 없었다. 최근 3주간 한국갤럽의 대통령 지지율은 62%-56%-55%로 2주 연속 하락세다. 리얼미터는 54.9%-54.3%-53.4%다. 두 조사기관 모두 생중계 업무보고는 긍정적 평가를 받았지만 경제 불확실성과 특정 기관장 공개 질책이 지지율에 부정적 영향을 주었다고 분석했다.

한국갤럽의 조사에서 대통령 부정 평가 이유 1위는 경제와 민생이다. 요즘 이런저런 모임에 가면 대화가 집값에서 시작해 환율로 끝난다. 그런데 새해 국정운영 방향을 제시하는 이번 업무보고는 탈모에서 시작해 생리대로 끝난 느낌이다. 이 대통령은 “젊은 사람들이 보험료만 내고 혜택을 못 받는다”며 탈모약 건강보험 지원 검토를 지시했다. 취업이 안 돼 자존감이 바닥나고 뛰는 월세 내느라 죽을 지경인데 “탈모는 생존의 문제”라는 말이 와닿겠나. 이 대통령이 “국산 생리대 가격이 비싸다”며 실태 파악을 지시한 날엔 친명 여성 커뮤니티도 들썩였다. “생리대값 안 내려도 되니 집값과 환율을 잡아달라.”

한국갤럽 조사에서 대통령 부정 평가 이유 2위가 도덕성 문제다. 이 대통령은 “능력은 없는데 연줄로 버티는 경우”와 “부패한 이너서클”을 질타했다. 바른말도 행동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역효과만 난다. 대통령의 질책을 듣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을 떠올린 사람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국회의원과 대통령실 비서관이 “훈식이 형” “현지 누나” 운운하며 대학 동문 출신을 공공기관도 아닌 민간 협회장 자리에 앉히려다 들키지 않았나. 대통령 사법연수원 동기로 북한 안보리 결의안도 몰라 망신당한 유엔대사는? 대통령의 변호사 출신으로 공직을 차지한 사람들은? “이 대통령은 민족의 축복”이란 아부 외엔 발탁 사유를 모르겠는 인사혁신처장은?

이 대통령은 이달 초 업무보고를 생방송으로 진행하겠다며 “국민 알권리 존중, 투명한 국정 운영 실현 원칙에 따른 것”이라고 했다. 강유정 대변인은 “CCTV를 늘 켜놓고 국민께 공개하고 감시받겠다는 뜻”이라고 부연 설명했다. 제대로 감시받겠다는 자신감과 의지는 평가할 만하지만 일방적 소통을 생중계한다고 국정 운영이 투명해지고 국민 알권리가 보장되는 건 아니다. 올해 국정감사 기간 내내 야당 의원들이 묻고 물었어도 ‘핵심 실세’ 김현지 제1부속실장의 기본적인 이력은 아직도 베일에 가려져 있다.

현 정부 들어 소통의 효용을 실감한 건 3일 외신 기자회견이었다. 한 기자가 “북한에 억류된 한국 국민들의 석방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겠는가”라고 묻자 이 대통령은 “처음 듣는 얘기”라고 했다. 질문한 기자도 놀라고 듣는 국민도 놀랐다. 회견 다음 날 대통령실은 북한에 억류된 한국인 현황을 공개하며 “조속한 남북 대화 재개 노력을 통해 해결해 나가겠다”고 했다. 정부가 제대로 일하는지 감시하고 국민에게 책임을 다하도록 견제하는 건 날카롭게 묻고 성실히 답하는 정부와 언론 간 양방향 소통에서 이뤄질 수 있는 일이다.

정부 내에선 벌써부터 잼플릭스 시즌 2 얘기가 나온다. 본편만 한 속편은 만들기 어렵다. 설사 흥행하더라도 시청률이 깡패인 넷플과 여론의 지지를 얻어야 하는 국정은 같을 수가 없다. 신뢰받는 정부가 되려면 정부 감시와 견제가 본업인 국회와 언론에 설명의 의무부터 다해야 한다. 잼플릭스 제작은 선택이지만 이건 필수다. 국회와 언론을 불편해하며 일방적 홍보만 고집하다 탈선한 전임자의 불행을 잊지 않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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