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서 명예퇴직…아픔 달래려 달리고 달렸다”[양종구의 100세 시대 건강법]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5월 22일 14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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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덕제 씨가 고향인 충남 예산의 예당저수지 출렁다리를 달리고 있다. 그는 매일 새벽 10~15km를 달린 뒤 하루를 시작한다. 예산=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성덕제 씨가 고향인 충남 예산의 예당저수지 출렁다리를 달리고 있다. 그는 매일 새벽 10~15km를 달린 뒤 하루를 시작한다. 예산=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만약 달리기가 없었다면 어땠을까요? 상상도 하기 싫습니다.”

성덕제 씨(59)는 약 4년 전인 2017년 여름을 잊지 못한다. 잘 다니던 대기업에서 갑자기 명예퇴직을 당했다. 해당 기업과 관련된 국제시장 상황이 악화되면서 시행된 구조조정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1988년 입사해 30년을 다녔던 회사였다.

“절망 그 자체였습니다. 매일 나가던 회사를 가지 않으니 갈 데가 없었어요. 시계바늘처럼 돌아가던 일상이 퇴직하면서 태엽이 풀려 멈춰버린 괘종시계 같았습니다. 며칠간 고민을 했죠. 과연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다행히 그에겐 달리기가 있었다. 그 무렵 건강이 악화돼 시작했던 달리기를 매일 하며 실직의 아픔을 달랬다. 그는 “절망은 했지만 달리는 것은 멈추지 않았어요. 10km 달리려다 20km 달리고, 20km 달리려다 30km를 달리고…. 그러다보니 울분도 날아가고 침착하게 다른 일도 추진할 수 있었습니다. 그 때 제게 유일한 희망이 달리는 것이었습니다”고 회상했다.

고교시절부터 태권도를 했고 회사를 다니면서 축구와 수영 등을 즐겼던 그는 나이를 먹으면서 오히려 체력이 좋아지기보다 나빠지는 것을 느끼면서 달리기를 시작했다. ‘달리는사람들’이란 울산의 마라톤동호회 회장이 후배였는데 함께 만나 운동을 하다 달리기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옆에서 지켜보니 함께 운동해도 될 것 같아 클럽에 가입할 생각으로 운동장 10바퀴를 달렸습니다. 그런데 50대 초반 아주머니를 뒤 쫓아가다 중간에 포기했어요. 물론 천천히 달리면 완주는 했을 텐데…. 페이스를 아주머니에 맞추다 오버한 것이죠.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매일 혼자 열심히 달렸습니다. 한 3개월 달리니 따라갈 수 있었죠.”

인터넷 유튜브 등을 보며 공부도 했다. 동호회 선배들이 “녹아들어서 잘 따라다니면 된다”고 했지만 훈련하고 체계적으로 먹고 회복하고 등 쉽게 따라가지 못했다. 성 씨는 “한 1년 고통의 연속이었지만 어느 순간 몸이 익숙해지면서 쉽게 달릴 수 있었다”고 말했다.

울산 동구의 해발 202m 염포산을 달리면서 자신감을 얻었다.

“마라톤 시작 1년 반쯤 지났을 때 벚나무로 터널같이 이어지는 염포산 편도 8km 코스를 왕복했어요. 오르막 내리막이 이어지는 코스를 달리고 나니 어디든 달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2018년 4월 영남 알프스 9봉을 지인들과 달렸다. 영남알프스는 울산 울주군, 경남 양산시와 밀양시, 경북 청도군과 경주시 등 5개 기초자치단체에 몰려 있는 해발 1000m 이상 9개 산군(山群)을 가리킨다. 가장 높은 가지산(해발 1241m)을 비롯해 간월산(1069m) 신불산(1159m) 영축산(1081m) 천황산(1189m) 재약산(1108m) 고헌산(1034m) 운문산(1188m) 문복산(1015m) 등이다. 하루에 다 달린 것은 아니고 2,3일에 걸쳐 달렸다. 지리산에도 올랐고 2019년 2월에 다시 영남 알프스 9봉을 달렸다. 자신감이 충만했다.

2019년 한 해에만 3200km를 달렸다. 하루 평균 10km에 가깝다. 올 2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 19) 탓에 언택트로 열린 대회에 출전해 처음 풀코스를 달렸다. 언택트 마라톤대회는 거리와 시간을 측정하는 앱을 실행하고 혼자 달린 뒤 대회 홈페이지에 올리는 코로나 19시대의 마라톤 레이스다. 기록은 3시간 59분 16초.

성덕제 씨가 고향인 충남 예산의 예당저수지 주변을 달리고 있다. 그는 2017년 명예퇴직을 당한 뒤 달리기로 실직의 아픔을 달랬다. 성덕제 씨 제공
성덕제 씨가 고향인 충남 예산의 예당저수지 주변을 달리고 있다. 그는 2017년 명예퇴직을 당한 뒤 달리기로 실직의 아픔을 달랬다. 성덕제 씨 제공
고향인 충남 예산으로 귀촌해 어머니하고 함께 살기 위해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땄다. 고향 요양병원을 다니면서 어머니를 모실 심산이었지만 아내가 울산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고, 어머니의 반대로 무산됐다. 대기업 하청업체 현장 노동일을 하기도 했다. 그는 “평생 보지도 들어보지도 못한 기구를 들고 선배들 밑에서 심부름 하는 일이었다. 평생 사무직으로 일해 적응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 일하고 있는데 코로나19가 터졌고 하청을 받지 못해 일을 그만두게 됐다”고 했다. 한 요양병원에 취직하기도 했다. 처음엔 요양보호사로 들어갔는데 대기업에서 중간 간부까지 했다고 기획실장으로 일하게 됐다. 하지만 그는 “난 대기업 마인드로 디지털시스템을 만들며 일하려고 했고 원장은 뭐든 수작업인 아날로그식으로 운영하려고 해 갈등을 벌이다 나왔다”고 했다.

하지만 뭐든 자신 있게 도전하고 있다. 지금은 고향인 충남 예산의 예당저수지 인근에서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모텔을 직접 운영하며 커피숍과 베이커리 등 시설관리를 해주는 일이다. 그는 “85세 어머니께서 치매에 걸렸다. 어머니 집에서 15분 떨어져 있으니 자주 가 볼 수 있다. 또 예당저수지 주변을 매일 달릴 수 있어 최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했다. 그는 매일 새벽 예당저수지 주변을 10~15km를 달리며 성공 의지를 다지고 있다.

달리면서 잔병이 사라졌다. 70kg까지 갔던 체중도 60kg으로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갔다. 과거 좀 힘든 일을 하면 피곤했는데 지금은 어떤 일을 해도 거뜬했다. 채식 위주 식이요법을 병행한 그는 올 3월 건강검진에서 혈관 건강지수가 23세 젊게 나왔다.

성덕제 씨가 지리산을 오르며 환호하고 있다. 그는 산악마라톤인 트레일러닝에도 빠져 지내고 있다. 성덕제 씨 제공
성덕제 씨가 지리산을 오르며 환호하고 있다. 그는 산악마라톤인 트레일러닝에도 빠져 지내고 있다. 성덕제 씨 제공
“약 7년 전이죠. 회사 다닐 때 50대 초반이었는데 업무 특성상 술을 많이 마셨어요.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 이불이 흥건히 젖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관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먹는 것을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30년 심마니를 한 사부님을 만나 온갖 약초를 공부했다. 지금까지 캔 산삼만 70뿌리 정도라고. 경옥고와 공진단도 직접 만든다.

“단백질과 지방, 단백질 3대 영양소에 비타민과 미네랄까지 5대 영양소를 고르게 먹으면 몸이 또 달라집니다. 전 각종 야채로 청혈주스(피를 맑게 하는 주스)를 만들어 먹습니다. 운동을 열심히 하면서 청혈주스까지 마셨더니 혈관건강 지수가 36세로 나와 간호사들도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달리기는 심신을 건강하게 해준다. 사람의 나이는 매년 먹는 나이가 있고, 뼈와 심장, 근육, 혈관 등 5가지 나이가 있다. 매년 먹는 나이 외에는 관리만 잘하면 충분히 젊게 살수 있다”고 말했다.

성덕제 씨가 질주하며 환호하고 있다.그는 2017년 명예퇴직을 당한 뒤 달리기로 실직의 아픔을 달랬고 새로운 삶도 개척하고 있다. 성덕제 씨 제공
성덕제 씨가 질주하며 환호하고 있다.그는 2017년 명예퇴직을 당한 뒤 달리기로 실직의 아픔을 달랬고 새로운 삶도 개척하고 있다. 성덕제 씨 제공
여행이든 사업차 출장이든 집 나가면 운동할 수 있는 복장 2벌을 챙겨간다. 어디 가서든 달리기 위해서다.

“처음엔 긴 거리를 빨리 달리려고 했어요. 그런데 힘들더라고요. 천천히 즐기면서 달리니 30km를 달려도 편안했어요. 후유증도 별로 없고. 그 때부터 즐기면서 달립니다. 전 1km를 5분40초에서 6분 페이스로 달릴 때 가장 즐겁습니다.”

달리기전 30분 이상 필라테스나 요가도 필수다. 유연성이 좋아야 부상이 없다. 그는 바닥에 앉아 다리 벌려 배가 바닥을 닿는다고 한다.

성 씨의 사연을 들은 김병준 인하대 교수(스포츠심리학)는 “매일 자신이 정한 거리와 시간에 달리기를 완주하면서 작은 성공 경험을 쌓은 게 현실 삶으로 긍정적으로 이어진 것이다. 실직은 자기 맘대로 되지 않았지만 달리기는 자기 맘대로 통제하면서 자신감을 축적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달리기에서 얻는 성취감이 계속 이어지면 삶의 다른 영역으로까지 전이 된다. 한 스포츠를 즐기면서 자기관리는 물론 대인관리, 사회생활에서도 자신감을 찾아 새로운 영역에서도 잘 해 나가는 사람들이 많다”고 덧붙였다.

1990년대 말 외환위기가 왔을 때 국내에서는 마라톤 붐이 일었다. 실직의 아픔을 ‘인간 승리’의 드라마인 마라톤을 통해서 극복하는 사람들이 넘쳤다. 참고 인내하고 달리면서 건강도 챙기고 새롭게 도전해 위기를 이겨낸 스토리가 가득했다.

성 씨는 “코로나 19로 실직의 아픔을 겪는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다. 그래도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건강이 가장 중요하다. 건강해야 일도 할 수 있다. 어떤 운동이든 시작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매일 달리며 실직의 아픔을 달랬고, 새로운 삶도 개척하고 있다.

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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