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윤신영]과학의 문장(紋章)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3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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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신영 과학동아 편집장
윤신영 과학동아 편집장
이세돌 9단이 알파고와 분투하고 있을 때, 그 박진감 넘치는 대국보다 더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이 있었다. 대국 현장에 걸린, 알파고를 상징하는 로고였다. 가운데 빈 공간을 두고 띠 모양 둘이 둥글게 서로를 휘감고 있는 모습이, 언뜻 보면 태극 같기도 하고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나오는 인공지능 ‘할9000’ 같기도 해 신경이 쓰였다. 동양 게임에 도전한다고 태극 문양을 흉내 낸 건가? 영화 속 빼어난 인공지능에 대한 헌사인가? 주위에 요란하게 흰 원 여섯 개, 검은 원 여섯 개를 번갈아 두른 이국적인 모양이다. 어느 먼 나라의 신화에 나오는 태양 그림과 닮았나?

물론 안다. 가운데 둥근 문양은 알파고를 만든 구글 딥마인드사의 로고이고, 알파고는 거기에 바둑알을 둘러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냈다는 것을. 대국 때마다 그 로고는 화면 너머로 응시하듯 나를 쳐다봤고, 나는 어느 순간부터 그 그림의 존재가 무척 신경 쓰였다.

문장(紋章)이라고 할까. 문장은 가문이나 국가를 상징하던 그림이다. 전투라도 벌어지면 서로의 문장을 자존심처럼 내걸고 싸웠다. 그림을 숭배해서가 아니었다. 문장으로 상징되는 가문의 전통과 역사, 자부심을 드러내는 거였다. 깃발 걸고 싸우는 낭만적인 전투 개념이 사라진 지금은 축구 경기 때에나 대리 격인 국기를 볼 수 있다. 그런데 알파고의 로고에서 문장의 부활을 본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자부심을 느껴도 좋을, 어떤 분야를 만들고 선도하는 강력한 ‘진짜’들만의 아우라가 풍기는 문장을.

알파고만이 아니다. 과학 분야에서는 문장에 집착하는 연구 집단이 꽤 많다. 작년 명왕성을 근접 비행한 미국의 탐사선 뉴허라이즌스호를 위키피디아에서 찾아보면 화려한 임무 로고가 먼저 뜬다. 올해 7월 목성에 도착할 탐사선 ‘주노’ 역시 로고가 나온다. 세계 최대 규모의 입자물리학 연구시설을 보유하고 있고, 2012년에는 ‘신의 입자’라고 불리던 힉스 입자를 발견하며 물리학의 성배 중 하나를 차지한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는 어떤가. 홈페이지를 열면 바로 곡선 몇 개와 연구소 이름으로 마감한 간결하고 허세 없는 로고가 반긴다. 중력파를 발견한 라이고(LIGO) 과학협력단의 로고도 최근 눈에 많이 띈다. 이들의 족적은 하나하나가 미지의 영역을 개척한 흔적이라, 그 로고는 아무리 간결해도 문장 같은 힘이 있다.

우리에게 문장이 있나 생각해 본다. 물론 한국에도 수많은 연구소와 연구단, 기술기업이 있다. 대기업 중에는 세계적 수준을 자랑하는 곳도 있다. 하지만 문장이라고 할 만한 것은 거의 떠오르지 않는다. 분야를 개척하고 기술을 선도해본 곳만의 자부심이 담기지 않은 문장은 울림이 크지 않다.

얼마 전 한 물리학자와 대화하다가 이런 질문을 들었다. “한국에 인공지능 전문가가 있긴 하냐”고. 인공지능의 성배인 바둑을 연구하지 않은 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한국에도 이전부터 꾸준히 연구해 온 훌륭한 현장 연구자들이 있다. 이들은 지금도 언론의 주목과는 상관없이 묵묵히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바둑 인공지능을 연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연구계획서를 쓰는 단계에서 도대체 무슨 쓸모가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테니까. 혹은 성공한 해외 사례가 있느냐는 질문을 받고 당황했을 것이다.

안전한 것, 검증된 것만을 과학자들에게 요구하는 분위기가 바뀌지 않는 한, 자랑할 만한 문장을 갖는 일은 요원할 것 같다. 가끔은 “인류의 성취” 운운하며 허세처럼 자랑할 것도 있어야 사는 건데 말이다.
 
윤신영 과학동아 편집장 ashilla@donga.com
#이세돌#알파고 로고#구글 딥마인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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