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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4년 5월 23일 18시 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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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도쿄증권거래소 주변은 2003회계연도(2003년 4월∼2004년 3월) 결산 결과를 발표하기 위해 모여든 상장기업 관계자들의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대상 업체의 15%인 270개사가 이날 일제히 실적자료를 내놓았다. 발표장에 들어서는 경영진의 표정은 밝고 여유가 있었다. 복도에서는 “그쪽 성적은 어떤가” “축하하네. 열심히 했구먼” “우리도 괜찮은 편”이라는 등의 얘기가 끊이지 않았다.
각사는 ‘사상 최대 이익’ ‘매출 대폭 증가’ ‘이익률 호전’ 등의 실적을 소개하면서 배당을 늘릴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배당 증액을 결정한 기업은 326개 업체로 전기보다 59% 늘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이 21일까지 실적발표를 마친 상장기업 1372개사를 집계한 결과 경상이익 합계는 전기보다 28% 증가한 19조3340억엔으로 사상 최대였다. 경상이익이 1000억엔(약 1조원)을 넘은 기업도 33개로 역시 가장 많았다.
▽“물건이 없어 못 팔 정도”=“거래기업들로부터 ‘(철강을) 더 많이 달라’는 얘기를 자주 듣지만 공급량에 한계가 있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철강업체인 JFE홀딩스의 부사장은 경영상의 애로를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장기침체로 고전했던 철강업계는 대(對)중국 수출 호조와 국내수요 증가가 겹치면서 대규모 흑자를 냈다. 신일본제철의 경상이익은 1600억엔으로 1년 전보다 230%나 늘었다.
해운업계의 발표회장에서도 비슷한 얘기가 들렸다. 한 해운업체 사장은 “중국 특수 덕에 운임이 최근 1년간 2배로 올랐지만 선박 부족으로 고객들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해 유감”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일본 경제의 회복을 이끈 양 날개로 중국 특수와 디지털 경기를 꼽는다. 대기업의 일감이 늘어나면서 소재업체, 하청업체, 운송업체에까지 온기가 퍼졌다는 것. 특히 디지털TV, 휴대전화, DVD 등 디지털가전 제품의 판매 증가는 자동차와 함께 일본 제조업의 한 축을 이룬 전자업계의 재기를 도와 산업 전체에 미치는 효과가 컸다는 분석이다.
아사히신문은 수출호조→기업수익 개선→설비투자 증가라는 선순환 구조가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공장 풀가동=샤프가 올 1월 액정분야의 우세를 지키기 위해 미에(三重)현에 준공한 액정패널 및 TV 공장은 24시간 풀가동되고 있다. 액정TV 판매대수가 1년 전보다 2배 이상 늘어났기 때문. 마치다 가쓰히코(町田勝彦) 사장은 “만약 공장을 짓지 않았더라면 마음이 쓰렸을 것”이라며 흐뭇해했다.
전자업계의 10개 대기업은 3년 만에 ‘전사(全社) 흑자’ 기록을 세웠다. 도시바가 디지털가전 제품의 핵심부품인 플래시메모리 수요 증가로 영업이익을 50% 늘리는 등 부품업체들도 디지털 경기의 과실을 톡톡히 챙겼다.
▽너도 나도 설비투자, ‘거품재발’ 우려도=대규모 흑자로 자금 여유가 생기자 일본 기업들은 설비투자에 돈을 쓰고 있다. 여기에는 과거 D램 메모리 반도체 분야의 투자를 소홀히 했다가 한국 업체에 주도권을 빼앗긴 전례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깔려 있다.
마쓰시타전기는 효고(兵庫)현에 세계 최대 규모의 플라스마 디스플레이 패널(PDP) 공장을 세워 2007년까지 연간 생산능력을 현재의 4배인 450만장으로 늘릴 계획. 내년 봄에는 세계시장 점유율 1위인 후지쓰히타치가 월 생산능력 15만장을 갖춘 공장 건설을 시작한다. 산요도 디지털카메라와 휴대전화 등의 설비투자액을 당초 계획보다 30% 이상 늘리기로 했다.
중국 동남아 등 해외로만 치닫던 대기업들이 일본 내 생산라인을 증설하거나 새로 공장을 짓는 쪽으로 선회한 것도 주목되는 흐름. 캐논은 올해부터 3년간 설비투자액 7800억엔 중 약 80%를 일본 국내에 집중키로 결정했다.
일각에서는 디지털가전 분야의 설비투자가 실제 수요보다 훨씬 빠르게 증가하는 점을 들어 거품 재발을 우려하기도 한다. PDP의 경우 마쓰시타와 후지쓰히타치의 공급능력만 합해도 세계 수요의 75%를 차지할 정도.
NEC 사장은 “이러다 3년 뒤에 공급과잉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말했지만 ‘거품경계론’은 호경기의 들뜬 기분에 압도당하는 모습이다.
도쿄=박원재특파원 parkwj@donga.com
▼"이번에도 혹시 반짝 활기?"▼
‘이번엔 진짜로 살아날까.’
일본 경제의 각종 지표가 호조를 보이자 전문가들 사이에는 최근의 상승세가 10년 이상 끌어온 장기불황의 종식을 의미하는지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이번 경기회복은 1990년대 초 거품 붕괴 이후 세 번째. 일본 경제는 1993년 11월∼97년 5월과 99년 2월∼2000년 말에도 ‘반짝’ 활기를 보였으나 주저앉았다. 차이점이라면 과거 2번은 정부의 재정지출 확대에 의해 불씨가 지펴졌던 반면 이번엔 기업실적 회복이 경기 상승을 이끌고 있다는 점. 일본 정부가 재정적자 축소에 신경을 쓰면서 공공사업의 경제성장 기여도는 2년 연속 마이너스를 나타냈다.
미국 경제의 호조를 바탕으로 한 것은 과거와 같지만 이번엔 중국 시장이라는 변수가 가세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그만큼 해외상황에 대한 민감도가 커졌지만 미국에만 의존해 온 일본 경제에 새 활로가 생겼다는 점에서 반길 만한 변화라고 전문가들은 설명한다.
올 1·4분기(1∼3월) 일본의 국내총생산(GDP)은 실질 기준으로 전기대비 1.4% 증가했다. 연율로 환산하면 5.6%에 해당하는 성장.
다케나카 헤이조(竹中平藏) 재정금융상은 “수출 외에 소비와 설비투자가 늘어 균형 잡힌 성장을 이뤘다”고 강조했다. 주가상승에 따른 효과와 감원공포 해소로 개인소비가 늘면서 실질 성장률을 0.5% 끌어올리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기업들이 장기불황을 거치면서 허리띠를 졸라매는 데 익숙해 있어 이것이 경기회복을 가로막는다는 지적도 있다.
일본 언론은 “가계소득이 늘지 않는 한 소비가 본격적으로 살아나기 힘들다”며 “기업 부문의 회복이 가계 부문까지 확산되느냐가 관건”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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