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 불법 선거운동 기승]ID 수십개 '선거꾼' 고용

  • 입력 2002년 9월 23일 19시 23분


《최근 경찰청의 사이버테러대응센터 선거전담반은 각종 사이트 게시판에 특정 후보를 비난하는 글을 집중적으로 올리고 있는 ‘사이버 선거꾼’들에게 광고성 e메일을 보냈다. 이른바 ‘e메일 수사’를 통해 이들을 찾아내기 위한 것이다. e메일 수사는 ID를 추적해 사이버 선거꾼의 e메일 주소를 알아낸 뒤 이들에게 광고 등으로 위장한 ‘미끼’ 메일을 보내 선거꾼이 이를 여는 순간 접속 위치가 곧바로 경찰청에 전송돼 검거하는 고도의 수사기법이다. 》

실제로 3월부터 청와대와 국회 홈페이지 등에 213회에 걸쳐 민주당 노무현(盧武鉉) 대통령후보를 비방하는 글을 올린 A씨(36)는 이런 방법으로 붙잡혀 구속됐다. 인터넷을 통한 사이버 선거운동이 가능해지면서 이를 악용해 불법 탈법 행위를 일삼는 사이버 선거꾼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

이들은 각종 게시판에서 ‘논객’으로 활동하며 특정 정당이나 대선 후보에 대한 근거 없는 비방의 글을 올리곤 한다. 개인적인 정치 성향에 따라 자발적으로 하는 경우도 있지만 정당에 의해 고용된 사람도 적지 않다는 게 경찰의 분석이다.

특히 각 후보 진영은 저마다 ‘사이버 홍보지원단’을 만들어 정상적인 사이버 홍보와 함께 합법과 탈법의 한계선을 넘나드는 사이버 선거전을 펼치고 있어 관계 당국을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실태〓회사원 B씨(36)는 7월부터 각 인터넷 사이트에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대통령후보를 비방하는 글을 180여회 올렸다가 경찰과 사이트 홈페이지 관리자의 공조로 최근 붙잡혔다.

경찰 조사 결과 B씨는 10여개의 ID로 각종 사이트를 드나들었다. 경찰은 B씨가 사용하는 ID를 사이트 관리자들에게 알려주고 B씨가 글을 띄우면 즉시 연락해줄 것을 요청해 대전의 한 PC방에서 붙잡을 수 있었다. 6·13지방선거 때는 충북도지사로 나온 한 후보를 비방하던 지방대 교수 3명이 이런 방법으로 적발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같은 검거 사례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사이버 공간에서 이뤄지는 불법 선거운동은 워낙 수법이 다양해 적발 자체가 쉽지 않다. 또 합법과 불법의 한계가 모호한 각 정당의 조직적인 사이버 홍보에 대해서는 마땅히 제재할 수단이 없는 실정이다.

정당의 사이버 홍보는 크게 긍정적 전략과 부정적 전략 2가지로 나뉜다. 긍정적 전략은 정강이나 정책을 법의 테두리 안에서 적극 홍보하는 것이고 부정적 전략은 상대 후보를 비방하거나 상대 진영을 골탕먹이는 것으로 다분히 불법 선거운동의 소지가 있다.

올 서울시장 선거에서 나타난 ‘답글(REPLY) 달기’도 부정적 전략의 대표적인 사례. 자기 후보를 비방하거나 공격하는 글이 뜨면 아르바이트생을 동원해 글의 내용과 관계없는 ‘답글’을 수십 개씩 띄워 원문이 뒤로 밀려 다른 페이지로 넘어가 네티즌들이 보기 힘들게 만드는 수법이다. 또 게시판 운영자에게 압력을 가해 문제의 글을 삭제하도록 하거나 자기 진영의 후보를 공격하는 글을 띄운 사이버 논객을 정신병자로 몰아 글의 신빙성을 떨어뜨리는 전략도 자주 이용된다.

특히 사실과 다른 ‘비방글’을 올린 뒤 이를 인터넷 언론매체에 ‘시민기자’의 이름으로 보도되게 함으로써 상대 후보에 타격을 입히는 전략도 구사된다.

심하게는 △서버 추적을 피하기 위해 외국 거주자나 외국 서버를 경유해 비방 글을 올리거나 △스팸메일 공격으로 상대 후보의 서버 다운시키기 △바이러스를 유포시켜 시스템을 파괴하는 방법 등도 이용하고 있다는 게 경찰의 분석이다.

▽당국의 대응〓경찰청 사이버테러대응센터는 현재 전국적으로 653명의 사이버 요원을 동원해 공공기관 사이트 308개, 정당 후보자 관련 사이트 323개, 언론사와 시민단체 사이트 419개 등 모두 1050개의 사이트에 대해 24시간 순찰활동을 펴고 있다.

특히 과거에 특정 후보를 비방해 구속된 전력이 있거나 이른바 사이버 논객으로 활동 중인 사람들은 특별 관리대상으로 관찰하고 있고 지하에서 활동하고 있는 유명 해커들의 동태도 예의주시하고 있다.

경찰청은 선거법 위반 혐의가 적발될 경우 중앙선관위와 협의하고 최종적으로는 검찰의 지휘를 받는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공인으로서 감내해야 할 수준의 비방은 문제삼지 않되 허위사실이나 악의적인 비방은 처벌한다는 단속 원칙을 세웠다.

하지만 원칙 자체가 모호한데다 사안이 정치적이기 때문에 경찰이 적극적으로 나서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 게다가 급증하고 있는 인터넷 언론매체에 대해서는 불법 행위를 적발하고도 손을 쓰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이버테러대응센터 조현오(趙顯五) 과장은 “사이버 선거꾼의 단속은 표현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기 때문에 매우 조심스럽고 용의자의 신원을 파악해도 검거가 어렵다”며 “단속에 앞서 게시판 실명제 등 제도적인 보완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훈기자 dreamland@donga.com

이진구기자sys1201@donga.com

▼전문가 제언▼

인터넷을 통한 사이버 선거운동 과정에서 발생하는 각종 폐해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원천적으로 이를 막기는 불가능하지만 부작용을 줄이고 올바른 사이버 문화를 정립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제도 및 기술적인 보완이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김주헌(金周憲) 사무관은 “일단 기존 언론매체와는 확연히 다른 인터넷 언론에 대한 새로운 개념 및 제도적 기준 마련이 시급하다”며 “현재로서는 기존 인쇄매체에 준하는 선에서 선거법이 적용돼 상당한 마찰이 예상된다”고 말했다.

김 사무관은 “선거기간에 인터넷 언론매체가 활발히 활동할 경우 선거 판도에 미치는 영향도 적지 않을 것”이라며 “행정 부처와 국회 등 관계 당국의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사이버 선거운동이 메일 중심으로 이뤄지는 미국과 달리 게시판 중심인 한국의 특성상 글을 올리는 사람을 알 수 있도록 실명제나 필명제를 도입할 필요도 있는 것으로 지적됐다.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유세경(劉世卿) 교수는 “표현의 자유와 상충되긴 하지만 건전한 사이버 문화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인터넷 언론매체나 각 정당의 사이트 등 영향력이 큰 게시판의 경우 대선 기간만이라도 실명제나 필명제를 도입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또 선거를 직접 치르는 각 당의 사이버팀 관계자들은 “인터넷 언론매체들이 자체적으로 연합체를 구성해 선거에 참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 정당의 관계자는 “후보자들이 모든 인터넷 언론매체에 참여할 수는 없는 일”이라며 “인터넷 언론매체들이 자체적으로 연합체를 구성하고 그에 맞춰 토론회 등의 일정을 잡는다면 보다 나은 사이버 선거문화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진구기자 sys1201@donga.com

▼6월 서울시장선거 두 후보 사이트 황폐화▼

사이버선거전이 극단적으로 벌어진 최근 사례는 6·13 서울시장 선거다.

하루에도 수십건씩 오르는 이른바 ‘도배’ 글로 한나라당 이명박(李明博) 후보와 민주당 김민석(金民錫) 후보의 사이트가 황폐화되다시피 했다. 여기에 스팸메일의 융단폭격과 아르바이트생을 동원한 ‘리플(답글)’ 달기도 가세했다.

이 때문에 김 후보측의 자유게시판은 한 화면에서 볼 수 있는 제대로 된 글이 2, 3건에 불과했다. 논쟁이나 토론이 이뤄질 만한 글이 올라오면 ‘개고기 합법화’ ‘종로서적을 살리자’ ‘이을용 선수를 유럽으로’ 같은 엉뚱한 리플이나 글들이 4∼8개씩 뒤따른 것.

견디다 못한 실무진이 사용자의 인터넷프로토콜(IP) 추적에 들어갔지만 IP세탁프로그램을 이용해 미국 멕시코 태국에서 글을 올린 것으로 나타나 추적이 불가능했다.

당시 김 후보측의 인터넷 팀장을 맡은 윤재관(尹載寬)씨는 “2, 3개의 조직화된 ‘세력’이 상습적으로 저지른 것으로 추정된다”며 “이런 사이버테러로 인해 인터넷을 통한 건전한 토론은 거의 상실될 지경이었다”고 말했다.

윤씨는 “삭제나 고발을 할 경우 ‘비민주적’이라거나 ‘독선’이라며 글의 내용보다는 삭제나 고발 자체를 문제삼기 때문에 그 또한 쉽지 않은 일”이라며 “나중에는 건전한 네티즌의 흥미를 떨어뜨려 접속 건수가 크게 줄어들었다”고 말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 후보측 자유게시판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 후보를 편파적으로 옹호하는 글이 수십건씩 올라 역효과를 내기도 했다. 또 법정 선거운동기간 전에 ‘이명박 후보를 당선시키자’는 노골적인 글이 올라 사전선거운동 의혹으로 중앙선관위의 조사를 받기도 했다.

한나라당 김수철(金秀哲) 사이버팀 차장은 “지방선거가 끝난 지금도 조직화된 ‘세력’들에 의해 당의 사이트가 공격당하고 있다”며 “문제가 심각하지만 대응책은 없는 상태”라고 말했다.

김 차장은 “인터넷은 당의 공약이나 정책을 꼼꼼히 살펴보고 반론을 제기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쌍방향 매체”라며 “이런 훌륭한 도구가 사이버테러로 인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진구기자 sys120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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