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피플]이영남 이지디지탈 사장/무늬는 여자

  • 입력 2000년 10월 1일 17시 05분


“벤처기업 사장하면서 아쉬운거요? 비즈니스 때문에 미니스커트를 마음대로 못입는 거요. 자신있는 거라곤 다리 뿐인데…. 좋은 거? 양에 찰만큼 마음껏 일할 수 있다는 거죠.”

이지디지탈(www.egdgt.com) 이영남 사장(42)에게 자신있는 게 어디 날씬한 다리뿐일까. 20대 여직원들이 ‘벤치마킹’한다는 미모, 스스로 말하는 ‘공주 기질이 있는 여자’지만 그걸로 자본금 5000만원짜리 하도급 계측기업체를 12년만에 통신장비와 전자제어기기를 생산, 240억원 매출을 올리는 알짜배기 기업으로 키워낼 수 있을까.

서울벤처밸리의 기업가들 사이에서 이사장의 별명은 ‘무늬만 여자’. 여성으론 드물게 전자업종에서 일궈낸 탁월한 경영성과, 대기업의 사업부문을 인수해버릴 정도의 배짱과 추진력 때문이다. “체크해 본 적 없다”는 주량과 “룸살롱은 사업하기 편한 곳”이라는 지론은 전설이 된 지 오래. 여성벤처기업협회 부회장, 벤처기업협회 이사 등 직함욕심도 만만찮다.

기자를 만나 말문을 여는데도 거침이 없다. “인터뷰 준비를 했느냐고요? 영업사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거든요. 누구를 만나건 1,2분 안에 본론에 들어가는 연습은 20대에 마쳤어요. 나중에 해외 바이어와 수없이 만나면서 완전히 몸에 밴거죠.”

부산을 본사로 섬유 모피 전자제품을 생산하던 중견그룹 광덕물산에 82년 입사했다. “제가 영업을 제법 했어요. 국내외 모피영업을 맡으면서 회장님 눈에 띄었죠. 회장님 중매로 84년에 같은 회사 엔지니어로 있던 지금의 남편과 결혼했어요.”

딸(16)과 아들(14)을 낳으며 멈췄던 일욕심은 채 2년을 가지 못했다. 88년 광덕물산에서 전자사업부를 물려받아 창업해 자신은 전무로 대외활동을, 남편 장형서씨(이지디지탈 미국 현지법인 대표)는 기술개발을 맡았다.

“처음 5년간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방식으로 계측기를 생산하면서 ‘헝그리 정신’하난 제대로 키웠죠. 93년부터는 ‘전공’을 살려 영업일선에 뛰어들었어요. 국내 제휴처를 뚫고 일본에 혼자 건너가 바이어를 개발했어요. 전 사업이 적성에 맞나봐요. 그게 신나더라고요.” 98년에는 벤처기업에 등록. “벤처기업 사람들을 만나면서 내가 10년간 해온게 벤처라는걸 알게됐죠. 하지만 체질에는 아날로그가 남아있었어요. 경영을 혁신하고 업종을 전환하고, 투자를 유치하고, 이익은 직원과 함께 나눠야 한다는 걸 그들로부터 배웠습니다.”

배운건 확실히 써먹는 이사장. 지난해와 올해 굵직한 ‘사고’를 여러건 쳤다. 주위 사람들이 고개를 가로젓는 ‘도박’이었지만 승리는 매번 이사장의 몫이었다.

첫 번째 사고는 지난해 9월 LG정밀 범용계측기사업부문을 민수사업부를 인수한 것.

“주위에서 많이 말렸어요. 중소기업이 대기업 계열사를 인수하는게 말이 되냐고요. 심지어 남편도 말렸어요. 우수한 직원들이 따라오겠냐는 거였죠. 하지만 핵심인력과 기술확보를 위해 인수해야 한다고 우겼고 따라온 25명의 연구인력은 지금까지 고스란히 남아있어요.”

올 1월에는 미국의 통신네트워크 장비업체인 ADC텔레커뮤니케이션스와 기술이전 및 공동마케팅을 위한 전략적 제휴협약을 맺어 사업영역을 확장했다. 3월 영국 홍콩 일본 등지에 1200만달러(약 140억원)의 전환사채(CB)를 발행, 투자를 유치한 것도 그의 작품.

남부럽지 않은 상복(賞福)은 타고났다. 지난달 29일 벤처기업 전국대회에서는 철탑산업훈장을 받았다. 동탑산업훈장에 이어 벤처기업인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영예. “저 상욕심이 있는 모양이에요. 엔간한 상은 많이 받아봤지만 이번 ‘훈장’은 정말 기뻐요. 대학을 수석입학한 자식을 보는 심정이랄까요.”

진짜 자식문제는 어떨까. 서글서글하면서도 힘이 실린 눈매에 눈물이 고이는 맺히는 주제. “애들요. 둘다 몇 년새 미국에 보냈어요. 주로 남편이 돌보죠. 매일 12시나 돼야 퇴근하다보니 사춘기가 돼도 변변히 대화도 못했어요. 사실 아이키울 시간이 없어서 미국에 보낸거죠. 지난해까지는 돌아가신 시어머니가 키워주셨지만…. 하지만 조기유학에 대해서는 원래 찬성하는 편이예요.”

요즘 일고있는 벤처기업 위기론에 대해 이사장은 “내년에 코스닥으로 간다”는 말로 딱잘라 입장을 밝혔다. “코스닥을 기피하는 건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죠. 장이 좋건 나쁘건 기업의 내실만 있으면 상관 없다고 봐요. 일부 기업은 문제가 있지만 인터넷 비즈니스도 기존 제조업이나 다른 인터넷 기업과 인수합병이나 제휴를 통해 활로를 찾을 거예요.”

최근 여성 벤처사업가 가운데 ‘간판스타’로 부상하며 면담을 요청하는 여성 벤처창업자가 부쩍 늘었단다. “굉장히 열성적이예요. 제가 젊을 때 그랬던 것처럼…. 제일 부족한 게 ‘휴먼 네트워크’여서 사람들을 소개시켜주고 가능하면 투자도 하려고 해요. 여성 벤처기업인들의 ‘대모’소리 한번 들어보려고요. 그래서 사업도 키우고 돈도 더 벌어야 한다니까요.”

<박중현기자>sanju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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