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정보화 평가/달라지는 공직사회 풍속도]

  • 입력 1998년 11월 4일 19시 07분


“컴퓨터에 띄워놓기만 하면 다야. 제대로 보고를 해야지. 요새 젊은 사람들은 도대체 기본이 안 돼 있어.”

외교통상부의 Y사무관은 얼마전 담당국장으로부터 이런 핀잔을 들었다.

“솔직히 말해 곤혹스럽습니다. 관료사회에선 상관의 눈밖에 나면 출세길이 막히는 것은 상식아닙니까. 돈을 들여 아무리 좋은 시스템을 깔아 놓아도 생각이 바뀌지 않는데 어쩝니까.”

Y사무관의 가시돋친 말은 정부 부처에 전자결재 시스템이 도입된 이후 변화하고 있는 업무 풍경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고위간부들은 더 갑갑하다. 과거의 대면(對面)결재 시절이 아쉽기만 하다. 결재서류의 주요 골자를 일일이 설명해주고 중요한 대목은 빨간줄로 밑줄까지 그어주는 ‘기특한’ 부하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부 김상남(金相男)기획관리실장은 “직원들에게 다소 긴장감을 주면서 사인을 해야 하는데 그런 분위기가 없어져 아쉽다”고 말했다.

그러나 하위직원은 일단 띄워놓으면 더이상 상사의 귀찮은 잔소리도 피할 수 있어 더할 나위없이 편하다. 결재를 받으려고 사무실 앞에 죽치고 기다리는 일도 없어졌고 요약 메모지를 첨부하거나 예쁘게 포장까지 하는 불필요한 ‘낭비’도 없애게 됐다.

중간직에는 일장일단(一長一短)이 있다는 평가. 고위간부, 특히 장관과의 대면결재 시간은 자신의 실력을 내보이고 점수를 따거나 상사의 ‘심기(心氣)’를 읽을 수 있는 중요한 기회. 그러나 전자결재가 도입되면서 이런 기회는 원천적으로 사라졌다.

정부 업무 전반에 정보화바람이 불면서 공무원사회의 업무 풍속도가 크게 바뀌고 있다. 정보화는 피할 수 없는 거센 ‘제삼의 물결’.

이를 거부하는 공직자는 낙오할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의 분위기다. 나이를 이유로 내세우는 ‘컴맹’들에게 더이상 면책사유가 될 수 없다는 이야기.

강인덕(康仁德)통일부장관은 취임초 “컴퓨터를 못하는 사람은 진급이고 뭐고 아예 퇴출될 각오를 하라”고 선언해놓은 상태.

일부 장관은 직접 간부들의 컴퓨터실력을 확인하는 경우도 있다. 김선길(金善吉)해양수산부장관은 취임후 월요일마다 간부회의에 모든 국실장이 노트북을 들고 오도록 지시했다. 이로 인해 해수부 간부들 사이에 난데없이 컴퓨터 공부 바람이 불었지만 컴맹 탈출이 쉽지만은 않았다. 요즘도 컴맹 간부들은 미리 노트북에 회의자료를 저장해 들어가지만 장관 지시사항은 펜으로 종이에 메모하는 진풍경이 연출되고 있다.

정보화 물결로 퇴출 위기에 처한 또다른 공무원 군(群)은 기능직 여직원들. 얼마전까지 문서작성은 으레 여자 사무원이나 비서의 몫이었지만 이젠 모든 문서작성을 스스로 하면서 이들의 일거리가 줄어든 것.

반면 한때 ‘기피직’이었던 전산직은 정부내 새롭게 각광받는 자리가 됐다.

이기호(李起浩)노동부장관은 부내에서 잘 나가던 고교후배 고참과장을 한 달간 설득해 전산담당관 자리에 앉혔다. “노동부에서 가장 중요한 정보화사업에 유능한 사람을 앉혀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게 이장관의 지론.

정부정보화가 가져온 가장 큰 변화는 기존의 수직적 관계가 수평적 관계로 변화한다는 점이다. 얼굴을 맞댄 상태에서 야단치는 상하관계가 퇴색될 수밖에 없다. 자연스럽게 정실(情實)주의도 사라지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와 함께 정부정보화로 정책결정 과정의 투명성과 공정성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배순훈(裵洵勳)정보통신부장관은 “앞으로 정보화가 되지 않고서는 민주주의가 이뤄질 수 없다”고 잘라말했다.

그러나 이같은 정보화 열풍에도 당장 모든 행정사무가 전자결재로 해결될 수는 없다는 게 공무원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아직 ‘전자정부’로 가기에는 요원하고 고도의 정책적 판단이 필요한 사안은 보안 등의 걸림돌이 있기 때문.

지금까지 전자결재를 본격 도입해 업무에 활용하고 있는 부는 정보통신부 외교통상부 행정자치부 노동부 등 일부에 한정돼 있다.

정통부(전자결재율 52.1%)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한자릿수 결재율이고 그것도 예산결재 업무보고 등 기본적인 수준에서만 이뤄지고 있다.

〈이철희기자〉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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