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10년]<5·끝>전문가 진단 ‘한국 경제의 새 과제’

  • 입력 2007년 11월 22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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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1 ‘기업들, 자본금의 6배를 곳간에 쌓아 둔다.’(‘기업 유보율 현황과 시사점’·대한상공회의소) 대한상의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매출액 1000대 기업의 사내유보율(자본금 대비 잉여금)은 지난해 무려 616%나 됐다. 유보율은 2002년만 해도 232%였지만 2003년 429%, 2005년 550% 등으로 매년 증가해 왔다. 이는 기업들이 주요 회계지표인 수익성은 좋아졌지만 이 돈을 다시 투자하는 것에는 매우 소극적이라는 뜻이다.

#사례2 ‘코레일은 지방 수험생을 위해 이날 오전 4시 55분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KTX 임시열차 1편을 증편했지만 이 열차를 포함해 이날 오전 KTX 상경 열차표는 일찌감치 매진됐다.’(본보 7월 9일자 보도) 올해 7월 서울시 7, 9급 공무원을 뽑는 필기시험이 서울 시내 103개 중고교에서 9만여 명의 수험생이 응시한 가운데 실시됐다. 수도권을 제외한 수만 명의 지방 거주 응시생들이 시험을 치르기 위해 상경하면서 시험 당일 서울역과 강남고속버스터미널 등은 새벽부터 북새통을 이뤘다.》

10년 전 외환위기 이후 한국 경제는 외형상으로는 빠르게 회복됐지만 그 상흔(傷痕)은 아직도 깊이 남아 있다.

기업들에서 예전의 진취적이고 공격적인 경영 마인드를 찾기 어려워졌다. 젊고 유능한 인재들도 도전정신은 사라진 채 편하고 안정적인 일자리만을 선호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또 구조조정 과정에서 기업 부채는 많이 줄어들었지만 정부와 공공부문의 부채는 크게 증가했다.

이 같은 사회 전반의 ‘위험 기피 현상’을 극복하고 경제의 역동성을 다시 찾는 것은 고스란히 외환위기가 한국 경제에 남긴 숙제로 다가오고 있다.



○ 성장 기회는 앞으로 10년

전문가들은 외환위기 후 10년에 대한 평가 못지않게 앞으로의 10년을 제대로 설계하는 것이 더 시급하다고 말하고 있다.

한국 경제가 실질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현실적인 시간이 그 정도밖에 안 남았기 때문이다.

유례없이 늙어 가는 한국 사회는 이제 본격적인 고령사회에 진입하면서 곧 성장 동력이 꺾일 수밖에 없다는 것. 그 전까지는 선진국 자리를 꿰차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지난해 말 통계청의 ‘장래인구추계 결과’에 따르면 전체 인구 중 생산가능인구인 15∼64세의 비중은 9년 뒤인 2016년 73.4%로 정점에 오른 뒤 급격히 낮아지기 시작해 2050년에는 53%까지 내려갈 것으로 전망된다.

강석훈 성신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고령사회의 도래를 감안하면 앞으로 성장 가능한 기간은 10년밖에 안 된다”며 “중국과의 격차도 10년 이내에는 상당히 좁혀지거나 역전되는 만큼 한국은 우선 선진국이 된 다음에 고령 사회에 진입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 사라진 기업가정신 회복이 급선무

한국 기업들은 외환위기를 극복하면서 재무건전성을 눈에 띄게 높였지만 수익성 위주의 보수적 투자 경향이라는 부작용도 키웠다.

1980년대 내내 두 자릿수를 유지한 국내 기업들의 설비투자 증가율은 현 정부 초기인 2003년 ―2.3%까지 떨어졌다가 2005년 6.3%, 2006년 7.4%로 다시 살아나는가 싶더니 올해 9월 ―8.6%로 곤두박질쳤다.

이 같은 기업들의 투자 회피 현상은 일자리 창출 능력은 물론, 한국 경제의 잠재 성장률을 떨어뜨리고 있다는 우려가 많다.

홍순영 삼성경제연구소 상무는 “외환위기 이후 이른바 ‘애니멀 스피릿’으로 불리는 기업가정신이 사라졌다”며 “한국은 고령화에 대한 대처와 함께 기업들의 모험심을 다시 찾아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고 말했다.

이필상 전 고려대 총장은 “시중의 부동자금이 기업으로 흐르게 해서 기업들의 투자 기피 현상을 풀고 질 좋은 일자리를 만들도록 도와야 한다”며 “훌륭한 인재가 안정된 공기업 일자리만 찾지 말고 민간부문에 가서 창의적 활동을 하도록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 작은 정부, 노동 개혁도 핵심 과제

현 정부는 5년 동안 560여 차례에 걸친 조직 개편과 증원으로 중앙부처 공무원만 모두 5만8000여 명을 늘렸다.

몸집이 커진 정부는 균형발전 대책, 일자리 창출 등 주요 정책 도구를 틀어쥐고 국가 경제에 지나치게 참견해 왔고 결국 기업에 대해서는 각종 규제만 양산했다는 지적이 많다.

정문건 시정개발연구원장은 “단기적으로라도 한국 경제가 활력을 되살리려면 대폭적인 규제 완화와 작은 정부로의 회귀가 필요하다”며 “규제 수준을 적어도 선진국 평균 이하로 줄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대립적인 노사 관계 정상화도 선진국 진입의 필요조건으로 인식되고 있다.

대한상의가 지난해 말 대기업 및 중소기업 203개사를 상대로 조사한 결과 선진국 진입을 위해 가장 중요한 개혁으로 가장 많은 31.8%가 ‘핵심규제 완화 등 규제개혁’을 꼽았고 다음으로 29.9%는 ‘노사관계 개선 등 노동개혁’을 들었다.

이 밖에도 전문가들은 △창의적 인재 육성을 위한 교육정책의 제고 △고령화에 대비한 국가 재정 안정 △금융 시스템의 경쟁력 강화 등을 앞으로 10년간 풀어야 할 중요한 과제로 꼽았다.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S&P “가계부채-외채 늘어 여전히 불안”

환란 이전 신용등급 아직까지 회복 못해

외환위기 직후 급락했던 한국의 국가 신용등급은 지금은 어느 정도 회복됐지만 아직도 위기 이전의 대외신인도를 되찾지 못하고 있다.

1997년 말 세계 3대 신용평가회사인 무디스와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피치는 한국의 신용등급을 10월 이전보다 각각 6∼12단계 낮은 수준까지 끌어내렸다.

이후 각종 거시경제 지표들이 호전되면서 신용등급도 상향 조정돼 왔지만 여전히 무디스와 피치의 평가 등급은 외환위기 전에 비해 1단계 낮은 수준이고 S&P는 2년이 넘도록 외환위기 전 ‘AA―’보다 2단계 낮은 A등급을 유지하고 있다.

이를 두고 전문가들은 “한번 추락한 국가 신용을 만회하기가 쉽지 않음을 보여 주는 사례”라고 지적한다.

올해 초 S&P는 “한국의 신용등급이 ‘A’에 머무는 데는 가계부채 증가와 노동시장의 경직성, 시장에 맡기지 않고 과도하게 개입하는 정부 등의 요인이 있다”며 “한국은 (외환위기를 불러온) 10년 전 정책 실수의 대가를 아직도 지불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또 △북한 핵 등 지정학적 리스크 △중소기업 경쟁력 약화 △금융권 외채의 증가 등도 등급 상향 조정을 막는 요인이 되고 있다.

다만 북한 변수로 인한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감안할 때 경제적 측면에서만 보면 한국의 신용도가 사실상 외환위기 이전 수준을 회복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한국의 국가경쟁력도 전체 순위는 개선되는 추세지만 부문별로는 여전히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스위스 세계경제포럼(WEF)이 올해 발표한 국가경쟁력 순위에서 한국은 11위로 지난해보다 12단계 상승했고 국제경영개발원(IMD) 경쟁력 순위에서도 지난해보다 3단계 오른 29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한국은 WEF의 부문별 순위에서 고용 경직성(50위), 은행 건전성(69위), 해고비용(107위) 등은 경쟁력이 크게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IMD 조사에서도 투자·물가·교역·고용 지표로 평가되는 ‘경제 운영 성과’는 49위에 그쳤으며 정부 행정의 효율을 나타내는 사회적 제반 여건(52위), 기업 관련법(38위) 부문도 경쟁력이 뒤져 있다.

정임수 기자 ims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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