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줌인]대통령 통역의 빛과 그림자

입력 2005-07-02 03:18수정 2009-10-08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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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의 영어통역원이었던 이여진 외무관(가운데)이 2003년 5월 노 대통령이 미국 뉴욕의 9·11테러 현장을 방문했을 때 마이클 블룸버그 뉴욕 시장과의 대화를 통역하고 있다. 동아일보 DB 사진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영어 통역을 맡고 있는 이성환 외무관은 지난해 12월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과 함께 영국 왕실의 황금마차를 탔다. 영국 왕실은 1년에 두 차례만 국빈방문 기회를 허락한다. 국빈방문 때만 탑승이 허용되는 황금마차는 세계 각국의 정상들조차 재임 중에 한 번 타볼까 말까 하는 선망의 대상이다.

대통령의 통역은 겉으로 보기엔 이렇듯 화려하지만 이면은 긴장의 연속이다. 주로 외교관들이 맡는 대통령 통역에 대해 외교관 자신들은 “잘해야 본전”이라고도 한다. 잘해도 외교관이고, 못하면 ‘국가적인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YS는 못 말려’=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은 특유의 거침없는 말로 통역들을 가장 곤혹스럽게 했던 대통령으로 꼽힌다.

1993년, 지금은 타계한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이 국빈 방한했을 때의 일이다. 당시 회담의 주요 의제는 ‘외규장각 도서반환’이었다. 프랑스 측은 한번도 ‘반환’이란 표현을 쓰지 않으며 ‘교환대여’라고 말했는데 YS는 만찬 때 돌연 “오늘 정상회담에서 미테랑 대통령이 외규장각 도서를 반환키로 약속했다”고 폭탄선언을 해 버렸다. 통역을 맡은 외무부 심의관은 이 발언을 그대로 전했다가는 외교문제가 생길 것으로 판단하고 “양국 간 기술적인 추가합의를 거친 후 도서가 돌아올 것”이라고 통역했다.

1996년 말 YS가 말레이시아를 방문했을 때의 에피소드. 당시 YS는 공직자 골프 금지령을 내린 상태였다. 그런데 말레이시아 국왕과 외무장관이 한국 대사를 가리키며 “골프를 너무 잘 쳐 인기가 최고다”고 칭찬한 것. YS의 표정은 굳어졌고 대사는 안절부절못했다. 그러자 통역이 “국왕이 대사의 골프 실력을 칭찬하는 것을 보면 골프가 외교활동에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다”고 분위기를 잡았다. YS도 잠시 생각을 하더니 “국왕 각하, 우리 대사를 잘 부탁합니다”라며 얼굴을 폈다.

▽‘밥통과 주통’=통역들 사이에서 밥통은 ‘밥을 먹으면서 하는 통역’, 주통(走通)은 ‘조깅하면서 하는 통역’을 말한다. 오찬이나 만찬행사 때 하는 밥통은 가장 어려운 통역으로 꼽힌다. 사전에 의제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음식 얘기를 비롯해 워낙 다양한 주제로 대화가 이루어지기 때문.

노태우(盧泰愚) 대통령 시절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 부인이 노 대통령의 부인 김옥숙(金玉淑) 여사와 만찬을 할 때였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장수를 상징하는 학 등이 수놓아진 베갯잇이 화제에 오르는 바람에 어떻게 통역을 해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고 당시 통역을 맡았던 권태면 통일부 외교자문관은 전했다.

▽릴레이 통역=2004년 11월 노무현 대통령의 라오스 방문 때였다. 노 대통령이 라오스 총리를 접견할 때는 라오스어를 할 줄 아는 한국인 통역과 한국어를 아는 라오스인 통역이 동원됐다. 그러나 양쪽 다 어휘가 달려 숫제 대화가 통하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결국 양측은 다음 일정인 양국 정상회담 때는 ‘한국어-영어-라오스어’로 릴레이 통역을 하기도 했다.

▽통역은 그림자=대통령 통역의 철칙은 무엇보다 철저하게 그림자로만 존재해야 한다는 점이다. 대화를 나누는 정상들보다 튀어서는 안 된다. 정상들이 언론에 포즈를 취할 때 키가 큰 통역이 일부러 꾸부정하게 구부리는 것은 흔한 일이다.

여성 통역은 미모가 되레 부담이 되는 일도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통역이었던 한 여성 공무원은 수려한 외모 때문에 청와대 사진기자들의 불만의 대상이 된 일도 있다. 정상회담에서 두 정상이 눈을 맞추고 있는 사진을 찍으려는데 자꾸만 외국 정상이 여성 통역 쪽으로 눈길을 주는 바람에 ‘앵글’을 잡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김정훈 기자 jnghn@donga.com

▼대통령 통역 누가 하나

노무현 대통령의 통역 중 영어 일본어 중국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아랍어 등 이른바 ‘7대 언어’ 담당자는 외교통상부 직원이다. 단, 지난달 10일 한미정상회담에서 통역을 맡은 이성환 외무관은 대통령비서실 제1부속실 행정관으로 파견돼 있다. 이 외무관은 이태식(李泰植) 외교부 차관의 아들이다.

각각 일어와 중국어를 담당하는 서명진 신희경 외무관은 일본과 중국 정상이 참석한 ‘동남아국가연합(ASEAN)+3 정상회의’ 개최 직전인 2003년 9월 3일 동시에 특채됐다. 7대 언어 이외 국가와의 정상회담 일정이 잡히면 외교부가 평소 확보하고 있는 A급 민간 통역전문가 중에서 적임자를 뽑는다.

대통령 통역인 외교부 직원에 대해서는 별도의 보수가 없다.

민간 통역자에 대해서는 상당한 보수가 지급되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외교부는 구체적인 액수를 밝히지 않았다.

대통령 통역자로 결정되면 보안각서도 쓰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 통역의 자질을 묻는 질문에 “무엇보다 입이 무거워야 한다”고 답한 이성환 외무관은 통역 중 에피소드를 묻자 “말 못한다”며 입을 닫았다.

윤종구 기자 jkma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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