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458>卷六. 동트기 전

  • 입력 2005년 5월 15일 17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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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어떤 계책인데 저토록 강성한 초나라의 세력을 꺾어놓을 수 있다는 것입니까?”

장량이 반가워하는 낯빛으로 그렇게 받았다. 한왕이 수저를 밀어놓고 낮에 역이기에게 들은 말을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그러다가 장량의 얼굴이 점점 차게 굳어지는 걸 보고 머쓱해하며 물었다.

“자방(子房)은 이 계책을 어떻게 보시오?”

그러자 장량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가만히 되물었다.

“누가 이런 계책을 냈습니까? 대왕께서 이 계책을 따른다면 대왕께서 하시려는 일은 크게 어그러지고 말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리 된단 말이오?”

한왕이 역이기의 이름은 밝히지 않고 자신이 궁금한 것만 알려 했다. 장량이 가만히 왼손을 내밀어 상위에 놓인 젓가락을 몇 개 집어 들며 말했다.

“바라건대 앞에 있는 젓가락 몇 개를 빌려주시면 대왕을 위해 그 계책을 따라서는 안 될 까닭을 하나하나 일러 드리겠습니다.”

그리고는 오른손으로 왼손이 집어 들고 있는 젓가락 중에서 하나를 빼들면서 차분히 따져나갔다.

“옛날 은나라 탕왕이 하나라 걸왕을 쳐서 내쫓고도 그 후손을 기(杞)나라에 봉해준 것은 탕왕이 필요하면 언제든 다시 걸왕을 사지(死地)에 몰아넣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또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 주왕을 쳐 없앤 뒤에 그 후손을 송(宋)나라에 봉한 것도 필요하면 언제든 은나라 주왕의 목을 얻을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곧 탕왕과 무왕에게는 걸왕과 주왕이 죽고 사는 일[생사지명]을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그 후손을 다시금 왕으로 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대왕께서는 언제든 항왕의 삶과 죽음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습니까?”

“결코 그렇지는 못하오.”

“그렇다면 그게 육국(六國)의 후손을 다시 왕으로 봉할 수 없는 첫째 이유가 될 것입니다. 힘으로 천하를 온전히 움켜잡지 못했으면서 제후들을 왕으로 봉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장량이 그러면서 오른손이 뽑아든 젓가락을 상 위에 다시 내려놓고 다시 왼손에서 두 번째 젓가락을 뽑아들었다.

“무왕이 은나라로 쳐들어 갈 때 상용(商容=紂王 때의 현인으로 太行山에 은거하였다)이 살던 마을 어귀[閭=里門]에서 그의 밝고 어짊을 널리 드러내어 칭송하였으며, 옥에 갇혀 있던 기자(箕子=바른 말을 하다 수난을 당했다는 殷의 현인)를 풀어주었으며, 비간(比干=바른 말을 하다 죽은 殷의 현인)의 무덤에 흙을 더해 봉분을 키웠습니다. 그런데 지금 대왕께서는 성인의 무덤에 흙을 더하거나 현자의 마을을 표창하시거나 지자(知者)의 마을 어귀를 지나며 공경을 드러낼 수 있으십니까?”

“아니오. 아직 그럴 겨를이 없었소.”

한왕이 머뭇거리다 그렇게 대답했다. 장량이 두 번째 젓가락을 상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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