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313>卷四. 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11월 22일 17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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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과인은 결코 믿고 싶지 않았으나 일은 두 분이 걱정하신 대로 된 듯싶소. 팽성이 떨어졌다니 과인은 오늘로 떠나거니와, 두 분께서도 이곳 싸움이 뜻과 같지 않거든 군사를 거두어 뒤따라와도 좋소. 하지만 그때는 강한 군사를 뒤에 세우고 전군을 한덩어리로 하여 전횡(田橫)의 추격에 낭패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오.”

패왕은 별로 표정 없는 얼굴로 한마디 덧붙이듯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범증은 그 말에 비로소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병(精兵) 3만으로 먼저 달려가는 패왕의 전략은 얼핏 터무니없어 보였으나, 실은 집중과 신속뿐만 아니라 미더운 단후(斷後)까지 함께 헤아리고 있었다. 전투의 미묘한 기미를 본능적으로 체득한 장수만이 할 수 있는 절묘한 선택이었다.

3만 군사를 가려 뽑은 패왕은 그날 날이 어둡기를 기다려 한줄기 빠른 바람 같은 기세로 성양을 떠났다. 떠나기 전에 패왕은 먼저 용저와 항타에게 사자를 보내 일렀다.

‘두 장군은 군사를 수습하여 노현(魯縣)으로 오라. 이틀 뒤 항보(亢父)에서 과인의 중군(中軍)에 들어야 한다.’

패왕이 길을 노현으로 돈 것은 그곳을 휩쓸고 있다는 번쾌의 부대를 의식해서였다. 팽성에서 쫓겨 온 항양(項襄)의 무리를 구하는 일도 급하지만, 번쾌의 군사들을 등 뒤에 그대로 두고 팽성으로 달려가는 것은 더욱 께름칙했다.

정병 3만과 함께 하룻밤 하루 낮을 달리듯 하여 항보에 이른 패왕은 거기서 전갈을 받고 달려온 용저와 항타를 만났다. 용저와 항타의 군사는 그새 5000도 안 되게 줄어 있었으나 그래도 기세로는 보탬이 되었다. 패왕도 그때는 어려운 싸움을 앞두고 장수들의 분발을 이끌어내는 군왕의 몫을 잘해냈다.

“두 장군 모두 다음 싸움으로 정도(定陶)에서 입은 욕됨과 부끄러움을 씻으라!”

그 한마디로 나무람을 대신하고 좌우에 갈라 세워 중군의 두 날개로 삼았다.

달려온 기세와는 달리 패왕은 항보에서 하룻밤 장졸들을 편히 쉬게 한 뒤 다음날 일찍 노현으로 밀고 들었다. 그런데 행군이 시작된 지 한 식경도 되기 전이었다. 앞서 살피러 보냈던 군사들이 돌아와 알렸다.

“노현 쪽에서 한 떼의 인마가 달려오고 있습니다. 깃발이 없어 어느 편 군사인지 알 수 없으나 그리 큰 세력은 아닙니다.”

그 말에 패왕이 바로 말배를 차며 소리쳤다.

“가자. 우리 군기(軍旗)에 제사 지낼 희생이 때맞춰 이른 모양이다!”

그러면서 보검 자루를 움켜쥐는 품이 그대로 먹이를 노리는 호랑이 같았다. 오래잖아 한 떼의 군마가 조심스레 다가오고 있는 게 보였다. 그대로 덮쳐가려던 패왕이 선두의 말 탄 장수들을 바라보며 탄식처럼 말했다.

“저들은 팽성을 지키던 자들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항양 장군과 그 부장들입니다. 한군(漢軍)의 추격을 뿌리치고 이제 성양으로 길을 잡은 것 같습니다.”

패왕의 말에 자세히 살펴본 정공(丁公)이 그렇게 받았다. 그 무렵 저편에서도 초군의 기치와 패왕을 알아본 듯 멈칫하더니, 이내 항양이 말을 달려 나와 패왕 앞에 무릎을 꿇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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