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정진영]먼저 물러서야 국민마음 산다

  • 입력 2004년 11월 7일 18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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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 파행이 계속되면서 17대 국회에 대한 국민의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고 있다. 민생을 외면한 채 정쟁만 일삼는 모습이 과거와 달라진 게 없기 때문이다. 국론분열을 수습하기보다 오히려 심화시키고 있다. 국회파행의 책임에 대한 여야간의 공방을 이해 못 할 바 아니지만, 나라와 국민을 생각한다는 사람들이 보여줄 모습은 아니다.

▼작은전투 집착땐 큰승리 놓쳐▼

이해찬 국무총리의 야당폄훼 발언이 촉발한 현재의 대치정국은 여권 핵심부와 한나라당 사이에 존재하는 본질적인 차이와 불신에 기초하고 있다. 한마디로, 두 세력은 역사관과 세계관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특히 여권 핵심부는 자기우월적 도덕주의 관점에서 반대파를 바라보고 있다. 이 총리가 한나라당을 나쁜 정당이고 역사를 퇴보시킬 정당이라고 말한 배경에 이런 태도가 깔려 있다. 과거 자신들을 억압했던 세력에 뿌리를 둔 정당이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생각한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고백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정치를 선악의 대결로 바라보고 있다. 이런 역사관과 정치에 대한 인식은 반대파의 시민권 자체를 부정한다. 과거 독재정권들이 그랬듯이 반대파를 존재가치가 없는 역사발전의 걸림돌로 생각한다.

따라서 이 총리가 유감표명이나 사과를 하더라도, 여야 사이의 벽이 허물어지고 국회가 타협의 장이 될 것 같지는 않다. 최근 우리는 미국 대선을 통해 두 조각으로 분열된 미국의 모습을 보았다. 우리는 지금 미국보다 훨씬 더 분열된 나라에서 살고 있다. 더욱이 이러한 분열을 정치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일부러 조장하는 경향도 있다. 다음 대선을 겨냥한 정치게임이 벌써 진행되고 있으며, 대한민국의 역사를 어떻게 해석하고 미래를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를 놓고 벌어지는 소위 헤게모니 전쟁이 진행 중이다.

이런 와중에 사무총장이 ‘바보정당’이라고 고백한 한나라당은 정말 바보처럼 큰 싸움은 보지도 못한 채 자극적인 말다툼에 매몰돼 체면이나 세우려 한다. 그것이 자신의 분열과 입지축소를 위한 덫이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 채 과거로의 회귀를 전리품이라도 되는 것처럼 좋아한다. 정부와 여당에 대한 비판여론을 자신에 대한 지지로 오산하고, 조그마한 전투에서 가끔 승리한 것을 갖고 전쟁의 승리가 보장된 것처럼 착각한다. 자신들이 대변하는 이념과 세력의 승리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 무엇인지 고민하기보다 개인의 정치적 입지를 먼저 계산하는 소아병에 걸려 있다.

여권의 입장에서는 한나라당이 향수에 젖은 소수 극우세력에 지배되는 것이 가장 유리하다. 자신들의 이념적 공간이 그만큼 넓어지고 동원할 수 있는 지지자들도 훨씬 많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한나라당이 이념적 중간으로, 원칙과 포용력을 가진 자유주의 정당으로 변신한다면 여권에는 매우 위협적일 것이다. 여권은 오른쪽에서는 한나라당에, 왼쪽에서는 민주노동당에 지지자를 빼앗기고 설 땅을 잃어버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나라당 일부는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강한 야당이 되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30%의 고정적 지지자들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은 또 다른 패배의 길이다.

▼與, 정치를 선악대결로 몰고가▼

한나라당은 이제 즉각 국회를 정상화해야 한다. 이 총리의 폄훼발언에 대한 분노의 메시지는 국민에게 충분히 전달됐다. 이 발언에 대한 평가는 이제 국민들의 몫이다. 당내 사정상 이 총리와는 도저히 국정을 논할 수 없다면 총리와 직접 관련된 의사일정만 보이콧하면 된다. 국회는 국민의 대표기관이다. 한나라당도 결코 국회파행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이번 싸움에서 국민의 마음을 사고 승자가 되는 길은 이제 먼저 물러서는 데 있다. 전투에서 지고도 전쟁에서 이기는 길이다. 이것은 여권에도 마찬가지다.

정진영 경희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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