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윤영찬]원칙없는 與, 예고된 혼선

  • 입력 2004년 11월 7일 18시 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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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측 가능한 일이었다.

여권이 국가보안법 등 이른바 ‘4대 법안’의 처리를 공언했을 때 한나라당의 극렬한 반발은 예고돼 있었다. 이런 점에서 이해찬(李海瓚) 국무총리의 한나라당 폄훼 발언은 국회 파행 장기화의 원인이긴 하지만 전부는 아니다.

실제 이 총리의 발언은 4대 법안을 저지해야 한다는 부담 속에 내분 조짐마저 보였던 한나라당엔 ‘울고 싶은데 뺨 때려 준 격’이었다. 한나라당이 국회 등원 전제조건으로 ‘4대 법안의 강행 처리를 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여당에 요구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여권이 4대 법안을 강행 처리할지 모른다는 한나라당의 ‘우려’는 현실화되기 어렵다는 생각이다. ‘개혁’을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삼아 온 여권이 여론의 비판을 무릅쓰고 날치기를 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 여기에다 김원기(金元基) 국회의장이나 천정배(千正培) 원내대표도 자신의 정치 명운을 걸면서까지 4대 법안의 강행 처리에 총대를 멜 분위기는 애당초 아니다.

문제는 거기에 있다. 열린우리당이 이런 딜레마를 처음부터 인식했다면 다른 길을 택했어야 했다.

여권의 혼선은 원칙의 불확실성 때문이다. 총선 승리 직후 열린우리당은 당선자 워크숍에서 ‘실용주의’라는 노선을 채택했다.

하지만 정동영(鄭東泳) 의장의 사퇴 이후 이 원칙은 무너졌다. 당 지도부는 강성 개혁파를 설득하지 못했다. 당의 원내 최고의결기관인 의원총회에서는 대부분 강경론자들이 득세했다.

그 결과 ‘민생’과 ‘개혁’의 두 날개 중 민생은 뒷전에 밀렸다. 결국 당 지도부는 타협을 할 수밖에 없는 현실과 강경파의 4대 법안 강행 압박 사이에서 샌드위치 신세가 된 끝에 이제 물러설 수도 나갈 수도 없는 진퇴양난(進退兩難)의 처지에 빠진 셈이다.

여권으로서는 이제 타협을 할 것인지, 아니면 전부(全部)냐 전무(全無)냐의 도박에 나서든지 선택해야 할 시간이 왔다.

그러나 실용주의의 원칙으로 돌아가 국민의견을 다시 수렴하고 야당과 타협을 이뤄 내는 것이 가장 빠른 지름길이 아닐까.

윤영찬 정치부 yyc1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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