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213>卷四. 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7월 25일 17시 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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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대장군 韓信(12)

“대장군께서는 이 번(樊) 아무개를 너무 작게 보시는 게 아니오? 내 대왕을 따라 패현을 떠난 뒤로 크고 작은 수십 번의 싸움에서 장수로서 부끄럽지 않게 싸워왔거늘, 장군의 반열에 오른 지금에 이르러 겨우 잡일꾼 몇백명 데리고 길이나 닦으란 것이오? 그리고 애초부터 지키지도 못할 기한을 주며 목숨을 내놓겠다는 군령장을 쓰라니 어찌 이리도 사람을 업신여기고 몰아대는 것이오?”

마침내 참지 못한 번쾌가 한신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머리칼이 곤두서고 눈꼬리가 찢어질 듯 눈을 부릅뜬 게 홍문의 잔치에서 보여주었던 풍모를 떠올리게 했다. 그러나 한신은 한번 움찔하는 법도 없었다. 며칠 전 한왕 유방에게서 받은 부월을 높이 쳐들고 엄하게 번쾌를 쏘아보며 소리쳤다.

“이 부월은 대왕께서 대장군의 인수(印綬)와 함께 내리신 신표(信標)이다. 낭중 번쾌는 한나라 장수로서 대장군의 군령에 맞서려는가?”

“감히 군령에 맞서려 함이 아니라, 이 번쾌에게도 쳐들고 다닐 낯이 있어야 함을 말하고 있소이다. 대장군께서는 번쾌가 오늘 이처럼 짓밟히고도 다음날 장수로서 군사들을 이끌고 싸움터로 나설 낯짝이 남아있으리라고 보시오?”

번쾌가 좀 수그러들었지만 여전히 꺾이지 않는 기세로 맞섰다. 한신이 부월을 한층 높이 쳐들며 목소리를 높였다.

“군령관(軍令官)은 어디 있는가? 군령관은 대장군의 명을 받들어 낭중 번쾌를 옥에 가두라. 감히 군령에 맞선 죄를 물어 내일 여럿 앞에서 그 목을 베고 군문에 높이 매달 것이다!”

그때 군령은 글을 읽어 법을 아는 역((력,역))선생 이기(食其)가 맡아보고 있었다. 번쾌가 아무리 한군에서 으뜸가는 맹장(猛將)이요, 홍문의 잔치에서 한왕의 목숨을 구한 공이 크다 하나 당장은 서슬 푸른 대장군의 군명을 받들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사졸들을 풀어 번쾌를 옥에 가두게 했다.

그 소식을 들은 한왕 유방이 달려 나와 한신에게 빌었다.

“번쾌는 과인이 목숨을 빚진 장수일 뿐만 아니라, 사사롭게는 손아래 동서이기도 하오. 과인의 낯을 보아서라도 번 낭중을 용서해 주시오.”

하지만 한신은 성난 낯빛을 풀지 않았다.

“비록 임금이라 할지라도 대장군의 병권은 거둘 수 있지만 이미 발동된 군령을 막아서실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정히 번쾌를 살려주시려면 차라리 이 한신에게서 대장군의 인수와 부월을 거두어 가십시오!”

그렇게 버티다가 한왕 유방이 한신 앞에 무릎을 꿇는 시늉까지 하고서야 겨우 번쾌를 풀어 주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여러 장졸 앞에서 한 번 더 망신을 준 뒤였다.

“이번에는 대왕의 위엄을 거스를 수 없어 용서한다만 이런 일이 두 번 되풀이되지는 않을 것이다. 어서 가서 우리 대군이 동쪽으로 나갈 길을 엶으로써 떨어지다 만 그 목을 지켜라. 군사들을 엄하게 다잡아 반드시 기일 안에 잔도를 열어놓도록 하라!”

이에 쫓기듯 떠나기는 했으나 그렇게 무참한 꼴을 당하고 떠난 번쾌의 심사가 온전할 리 없었다. 곧 한신이 몰래 딸려 보낸 군사에게서 한신에게 전갈이 들어왔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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