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의‘놀이와 예술’]<2>카드속의 ‘조커’ 세상밖으로…

  • 입력 2004년 6월 21일 18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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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나다르 작 ‘사진기를 가진 피에로’(1854년). 오늘날 광대의 전형적 이미지가 된 이 피에로상은 사진의 모델인 샤를 드뷔로의 아버지 밥티스트가 만들어냈다. ① 현대의 카드에 그려진 조커. 카드의 한 조에 속하면서 동시에 속하지 않는 패다. ② 세바스티안 브란트의 책 ‘바보들의 배’의 삽화. 알브레히트 뒤러의 목판화다. ③ 그로테스크한 춤을 추며 뻔뻔한 일을 꾸미는 코비엘로. 15세기 이탈리아 서민희극 ‘코메디아 델라르테’에 등장하는 어릿광대다. ④ 친절한 미소 뒤에 잔혹함을 감추고 있는 메체틴.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어릿광대다.-사진제공 진중권
펠릭스 나다르 작 ‘사진기를 가진 피에로’(1854년). 오늘날 광대의 전형적 이미지가 된 이 피에로상은 사진의 모델인 샤를 드뷔로의 아버지 밥티스트가 만들어냈다. ① 현대의 카드에 그려진 조커. 카드의 한 조에 속하면서 동시에 속하지 않는 패다. ② 세바스티안 브란트의 책 ‘바보들의 배’의 삽화. 알브레히트 뒤러의 목판화다. ③ 그로테스크한 춤을 추며 뻔뻔한 일을 꾸미는 코비엘로. 15세기 이탈리아 서민희극 ‘코메디아 델라르테’에 등장하는 어릿광대다. ④ 친절한 미소 뒤에 잔혹함을 감추고 있는 메체틴.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어릿광대다.-사진제공 진중권
한 조의 카드는 52장이라고들 한다. 에이스(A)에서 10까지 열 장의 카드에 잭(J), 퀸(Q), 킹(K)을 더하면 13. 거기에 스페이드, 하트, 다이아몬드, 클로버의 4를 곱하면 52장. 그뿐인가? 아니, 실은 두 장이 더 있다. 바로 ‘조커’다. 조커는 한 조에 속하면서 동시에 속하지 않는다. 사회 안에 있으면서 사회 밖으로 추방된 ‘아웃사이더’인 셈이다.

조커는 가끔 카드 밖으로 튀어나온다. 영화 ‘배트맨’에서 주인공보다 더 매력적인 것이 조커다. 이 악동은 상상을 초월하는 짓거리로 사회질서를 뒤엎으려 든다. 사람만 해치지 않으면, 이 예술적 악마가 하는 짓은 일종의 퍼포먼스다. 조커가 없다면, 배트맨이 지키는 고담 시(市)는 혼란으로 망하기 전에 먼저 지루함으로 무너지지 않을까?

● 바보들의 배

조커는 어디서 왔을까? 몇 년 전 폴란드에서 벽을 온통 조커의 카드로 장식한 카페에 들른 적이 있다. 가만히 보니 옛날 것일수록 그 모습이 14세기 말에 유행했던 미친 바보, 즉 ‘광우(狂愚)’의 도상을 닮았다. 중세의 카드에는 교황, 마술사, 광대 등의 우의화(寓意畵)를 그린 22장이 더 있었는데, 훗날 ‘광대’만 남아 오늘날의 조커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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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독일의 인문주의자 세바스티안 브란트의 ‘바보들의 배’(1494)에 딸린 삽화다. 한 배 가득 실린 저 바보들이 바로 조커의 조상이다. 이 책에서 광우들은 탐욕, 오만, 미신 등 기독교에서 금하는 악덕의 화신으로 묘사되지만, 광우에 부정적 뉘앙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얼마 후에 나온 에라스무스의 ‘광우예찬’(1511)에서는 벌써 묘한 가치전도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 바보와 현자

에라스무스가 보기에 진짜 바보는 똑똑한 척하는 자들이다. 진정한 현자는 예수처럼 자신을 바보의 지위로 낮춘다. 예수가 당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 ‘유대인의 왕’을 자처했을 때, 세상은 그를 보고 미쳤다고 했다. 십자가에 달려 조롱당한 이 사내를 믿는 것 역시 당시에는 미친 짓이었다. 하지만 진짜 바보는 신의 아들을 몰라봤던 똑똑이들이 아니었을까?

어리석은 사회에서는 바보가 현자가 된다. 미쳐 버린 시대에는 광기가 이성이 된다. 디오게네스가 개처럼 통 속에서 살며 미친 척한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알렉산더의 권세를 비웃은 그를, 동료 시민들은 ‘미친 소크라테스’라 불렀다. 이 광기가 불편했던 시노페의 시민들은 이 철학적 바보에게 ‘추방형’을 내렸다.

● 그 많던 바보는 어디로 갔을까?

르네상스 시대 이후 바보들은 도시 밖으로 추방되어, 배에 몸을 싣고 이곳저곳 떠돌아다녔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아직 방랑의 자유가 있었다. 17세기에 들어오면 상황이 달라진다. ‘이성의 시대’에 광기는 제거되어야 할 질병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세상을 떠돌던 광우들은 체포되어, 병원이라는 이름의 감옥에 감금된다. 그 후 바보들을 보기 힘들어졌다.


이게 어디 서양만의 일인가? 우리 어린 시절 웬만한 동네에는 ‘바보’가 하나씩 살고 있었다. 나이는 먹어 덩치는 커도, 아이들과 어울려 딱지치기를 하다가, 기분이 좋으면 지나가는 아무에게나 뽀뽀를 하던 바보들. 그들은 일상의 한 부분이었다. 그런데 그 많던 바보는 다 어디로 갔을까?

● 신적인 광기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의 왕궁에는 광우가 있었다. 궁정의 바보는 왕의 권위를 조롱하고, 그의 권세의 무상함을 노래하는 광대였다. 왕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앉는 무례함도 선천적 정신박약의 탓으로 여겨져 너그럽게 용서되었다. 후천적 광우들, 즉 일부러 미친 척하는 훗날의 광대들은 광우로부터 이 발언의 자유를 물려받는다.

언제였더라? 거리에 연극 ‘빨간 피터의 고백’ 포스터가 나붙었던 시절,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에 나오는 광대에게 한없이 끌렸었다. 그의 헛소리 속에 불꽃처럼 스치는 진리. 그리스 비극에서는 합창단(코러스)이 인간에게 알 듯 모를 듯 신적인 지혜를 들려 주었다. 근대의 연극에서는 그 일을 광대가 넘겨받아 천기를 누설한다. 이성은 인간적이나, 광기는 신적이다.

● 위대한 피에로

‘광대’ 하면 떠오르는 것이 ‘피에로’다. 피에로는 16세기 이탈리아에서 발생한 ‘코메디아 델라르테’에서 나왔다. 이 즉흥극에는 유력자의 시종 노릇을 하는 어릿광대들(자니)이 등장하는데, 그들 중 하나(페드로니노)가 후에 광대의 대명사로 통하게 될 ‘피에로’가 된다.

웃음 뒤에 감추어진 우수. 우리가 아는 이 ‘현대적인’ 피에로 상은 19세기 초 파리에서 활동했던 천재적 광대 밥티스트 드뷔로가 만들어낸 이미지다. 유명한 사진작가 펠릭스 나다르가 이 새로운 피에로를 카메라에 담았다. 모델이 된 것은 그 전설적 광대로부터 역할을 물려받은 아들 샤를 드뷔로. 저 표정을 보라. 너무나 표현적이지 않은가.

● 웃음 뒤의 우수

피에로의 웃음 뒤에 감추어진 멜랑콜리는 예로부터 창조성의 표징이었다. 이성의 독재에 맞섰던 낭만주의 이후 예술은 광기와 연결되기 시작한다. 모더니즘이 탄생하던 시기에 발자크, 보들레르, 조르주 상드 등 내로라하는 작가들이 드뷔로의 팬터마임에 열광했다. 현대미술이 시작되는 시대에 피카소를 비롯한 수많은 화가들이 피에로에 매료되었다. 왜 그랬겠는가?

미학자 아도르노는 ‘어리석음’을 현대예술의 특징으로 들었다. 실제로 현대 예술가들은 광우가 된 느낌이다. 마르셀 뒤샹은 변기를 작품으로 출품했다. 요셉 보이스는 얼굴에 하얀 분칠을 하고 죽은 토끼에게 회화(繪畵)를 가르쳤다. 이브 클라인은 자신이 하늘을 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 조커, 카드 밖으로

바보짓이 지나치면 정말 광기가 된다. 어느 일본 예술가는 이브 클라인의 말을 믿고 고층빌딩에서 바닥의 캔버스 위로 뛰어내렸다. 호주의 사이버 예술가 스텔락은 제 팔뚝에 인공 배양한 귀를 이식할 예정이라고 한다. 에이즈에 걸린 화가가 제 몸에 상처를 내어 피를 튀기는 퍼포먼스를 할 때, 예술 감상은 차라리 모험이 된다.

오늘날 관객들은 더 이상 미술관에 아름다움을 보러 가지 않는다. 그들이 기대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오늘은 또 어떤 녀석이 어떤 미친 짓으로 나를 놀라게 할까?’ 조커들이 일제히 카드 밖으로 튀어나왔다. 고담 시를 충격에 빠뜨리는 조커처럼 오늘날 예술가들은 쇼크를 주는 광대가 되었다.

진 중 권 평론가·중앙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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