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8월의저편 317회…명멸(明滅)(23)

  • 입력 2003년 5월 16일 17시 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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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에게로 돌아가 딸들을 부탁하는 것이 우선인지 역 앞 아내의 친정에 가서 아내의 행방을 물어보는 것이 우선인지 하지만 아내가 있는 곳을 안다고 해서 뭘 어쩌자는 것도 아니다 아무 말 않고 호적을 파낸 일을 용서해 달라고 다시 한 번 시작해 보자고 고개 숙일 수는 없다 같이 살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그 집에서 동생과 딸들을 보살펴달라고도 할 수 없다 그리고 무슨 낯짝으로 장인과 장모를 만난단 말인가 내 다리가 움직였다 오른쪽 왼쪽 오른쪽 왼쪽 내 몸이 공기를 헤치면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공기가 이 쪽으로 오라고 길 안내를 하면서 내 몸을 인도하는 것 같다 오른쪽 왼쪽 오른쪽 왼쪽 정신을 차리자 밤나무 숲을 지나 용두산 비탈에 서 있었다 바로 여동생이 미끄러져 떨어진 장소였다 돌풍이 불었다 휭-휭 쌩-쌩 안 된다 그럴 수 없다 나는 세 아들과 두 딸의 아버지다 죽음은 용납되지 않는다 나는 오른발을 뒤로 내디디고 발꿈치와 몸을 오른쪽으로 돌렸다 나는 내 인생이 기다리는 어둠에 몸을 실었다 다리는 움직여주지 않았다 나는 내 다리에게 말했다 살아야만 한다 두 번 다시 생의 실감은 되찾을 수 없어도 그래도 살아야 한다 나는 외쳤다 오른쪽 왼쪽 오른쪽 왼쪽 5천미터를 15분28초4에 달리던 다리를 질질 끌며 오른쪽 왼쪽 오른쪽 왼쪽 너무 무겁다 지팡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고 보니 옛날 아주 어렸을 적 어머니가 나 죽으면 관 나갈 때 버들 지팡이 짚고 걸어야 한다고 얘기해 준 일이 있다

와 버들 지팡인데?

엄마란 말이재 아 하나 가져서 어엿한 사람으로 키울 때까지 마음고생이 억수로 많다 아가 눈에 보이지만 않아도 걱정하느라고 속이 터진다 다음에 버들가지 한 번 꺾어서 보거라 속이 꽉 차 있을 끼다 엄마 마음에 걱정이 꽉 차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내는 엄마한테 걱정 안 끼칠 끼다

그래, 정말이가?

약속한다 그러니까네 엄마는 죽지 마라

그래는 안 되지 엄마는 우철이보다 빨리 죽을 끼다

싫다 엄마 죽으면 나도 따라 죽을 끼다

그런 말 하면 못 쓴다 우철이는 오래 오래 살아야 된다 아주 오래 오래 약속이다 알았재

글 유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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