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이야기]자동차 명인 '포르셰' 전범재판정 선 사연

  • 입력 2003년 2월 10일 17시 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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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포르셰(porsche)’라고 하면 매력적인 스타일의 고성능 스포츠카를 떠올린다.

자동차에 좀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포르셰’라는 이름에서 20세기 자동차 역사에 가장 훌륭한 기술자로 평가받는 페르디난트 포르셰(1875∼1952)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정작 페르디난트 포르셰는 자신의 이름을 붙인 스포츠카를 만든 적이 없었다. 더욱이 그는 정규 대학교육도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포르셰가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히틀러의 요청으로 폴크스바겐의 딱정벌레 차, 비틀(Beetle)을 만들면서부터이다.

1936년 첫 비틀이 나오기 이전 이미 그는 뛰어난 자동차 기술자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전기와 기계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던 그는 18세 때 오스트리아의 한 회사에서 일과 공부를 함께하게 됐다. 낮에는 회사에서 일하고, 밤에는 빈 공과대학의 강의를 몰래 청강하는 생활을 했다. 이때의 청강이 그가 받은 유일한 대학교육이었다. 후에 빈 공과대학은 그에게 명예박사학위와 교수직을 주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혁신적인 자동차 설계 아이디어를 1900년 그의 이름이 붙은 첫 차 ‘로너 포르셰’에서 처음 적용했다. 이 차는 전기 모터로 움직이며, 모터 가동에 필요한 동력은 내연기관에서 얻는 일종의 하이브리드(hybrid) 차량이었다. 이후 그는 자동차는 물론 비행기와 배의 엔진 설계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고 여러 자동차 회사를 거쳐 다임러벤츠의 기술 책임자가 됐다.

1920년대 후반 나온 메르세데스벤츠 경주용 차(레이싱 카)의 엔진은 대부분 그가 설계한 것이었다. 1930년대에는 아우디의 전신인 아우토 우니온의 레이싱 카도 그가 설계했다. 포르셰는 자신이 설계한 서로 다른 자동차 메이커의 레이싱 카들이 경쟁하는 것을 보기도 했다.

이후 만들어진 비틀은 그의 이름을 더욱 드높였지만 그가 설계한 많은 군용차량들이 제2차 세계대전에 사용되면서 그 명성에도 오점이 생겼다. 전쟁이 끝날 무렵 그는 프랑스의 한 자동차 회사로부터 국민차를 설계해달라는 제의를 받았지만, 또 다른 프랑스의 경쟁 자동차 회사 소유주가 이를 문제삼았고 포르셰는 결국 전범 재판을 받은 끝에 투옥됐다.

그의 아들 페리 포르셰는 아버지의 보석금을 마련하기 위해 포르셰라는 이름을 단 ‘스포츠카’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포르셰는 ‘포르셰 356’이 큰 성공을 거두는 모습을 보며 1952년 눈을 감았다.

류청희 자동차컬럼니스트 chryu@aulonews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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