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산책]파리에서 온 남학생

  • 입력 1997년 1월 25일 20시 21분


파리에서 공부하는 한 남학생이 방학을 맞아 한달 예정으로 고국나들이를 했다. 그는 가족과 특히 가까운 친구들 얼굴을 그려보며 부푼 기대감을 안고 비행기에 올랐을 것이다. 그런데 이 남학생은 귀국한 지 열흘도 채 안되어 다시 짐을 싸들고 파리행 비행기를 타버렸다. ▼너무 바쁜 서울친구들▼ 원인은 그가 서울 친구들로부터 큰 배신감과 실망감을 느꼈다는 것이었다. 그는 서울에서 만난 친구들의 대화내용이 너무 단조롭고 천편일률적인데다 자기 관심사와 거리가 먼 것이어서 실망했을 뿐 아니라 너무 빨리 변해버린 친구들의 생활행태에서 배신감마저 느꼈다는 것이다. 그 변화란 이런 것이다. 약속장소에 나타난 친구들은 예외없이 휴대전화를 들고 있거나 삐삐를 달고 나왔다. 그리고 얘기 도중에도 휴대전화를 들고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통화를 시도하거나 삐삐 신호음을 듣느라고 바빴다. 파리 학생은 서울 친구들이 이렇게 분주한 생활을 하리라곤 상상조차 못했었다. 그는 조용한 찻집에서 그동안의 성장을 서로 확인해 보는 정답고 뜻깊은 해후를 기대했는데 그런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던 것이다. 이 얘기는 내가 이웃 친구로부터 얻어들은 것이다. 나는 파리에서 온 그 남학생에 관해 아는 바가 없다. 나이도, 취미도, 다니는 학교 이름도 모른다. 그렇지만 오래 벼르던 휴가기간을 접어두고 서둘러 출국비행기를 타버린 그의 기분은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작년 러시아에 갔을 때도 나는 그 파리 남학생과 비슷한 아쉬움을 하소연하는 여학생을 만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3학년생으로 모스크바에서 음악공부를 하고 있는 그 여학생은 내게 자기의 귀국경험담을 아주 노골적인 표현을 써가며 들려줬다. 『무슨 애들이 그렇게 한군데에만 관심을 쏟는지 모르겠어요. 한다는 얘기란 탤런트 누가 누구랑 친하고 가수 누구가 어떤 모습을 하고 나왔는데 멋지더라는 등 스타 얘기 빼면 할 얘기가 없더라구요. 저처럼 나와 있는 아이는 그런 세세한 정보를 모르니 대화에 끼어들고 싶어도 할 수가 없죠. 그러다 보니 금방 서로 멀뚱멀뚱 쳐다보게 되는거예요. 게다가 웬 삐삐들은 그렇게 기쓰고 차고 다니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데요. 저희들이 무슨 사업가도 아니면서. 애들하고 겨우 한시간 같이 앉아 있는데 지옥 같았어요. 전 그래서 당분간 서울 안갈래요. 그 돈 있으면 유럽여행이나 할거예요』 ▼단조로운 「소프트웨어」▼ 이 여학생은 엄마와 함께 와서 거주하며 비교적 안정된 분위기에서 유학생활을 하는 착실한 학생이었다. 이 학생이 호소하는 배신감에도 고국 친구들의 너무 빠른 변신이 원인으로 작용한걸 느낄 수 있었다. 옛날에는 외국의 유행과 변화가 국내에서 화제로 자주 등장했었다. 일본이나 미국 젊은이들이 즐겨 입는 옷, 즐겨 듣는 노래가 매력있는 화제였다. 그런데 지금 밖에 나가 사는 동포들 사이에는 서울 사람들, 특히 신세대의 급변하는 풍속이 중요한 화제로 등장하고 있다. 그 변화란 앞서 두 학생이 증언하고 있듯이 주로 하드웨어 쪽이다. 첨단통신기기로 무장하고 옛 친구 앞에 등장했지만 소프트웨어 쪽은 텅 비어 있거나 아주 단조롭고 건조한 몇가지 메뉴로만 가득 차 있을 뿐이다. 이것은 우리 교육환경―사회교육까지 포함해서―에 대한 하나의 진단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물론 예외가 적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두 학생의 시각을 전면 부정할 자신이 없다. 송 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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