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스페이스X 시험 비행장에 함께 등장한 일론 머스크 스페이스X 최고경영자(왼쪽)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보카치카=AP 뉴시스
같은 해 11월 대선을 8개월 앞둔 시점에서 당시 세간의 관심사는 ‘과연 머스크가 트럼프를 공개 지지할지’였다. 머스크는 그간 미국의 특정 대선 후보를 지지한 이력이 없었다. 하지만 빅테크 규제에 나섰던 조 바이든 행정부 출범 후 바이든 정권과 민주당에 대한 반감을 매우 노골적으로 드러내 트럼프 지지가 임박했다는 관측이 힘을 얻고 있을 시기였다.
그러나 머스크는 계속 ‘밀당’했다. NYT 보도까지 나오자 트럼프 지지자들은 한껏 들뜬 분위기였는데 머스크가 찬물을 끼얹었다. 지난해 3월 5일 보도가 나고 바로 다음 날 자신의 X에 “어떤 대선 후보에게도 기부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한 것.
트럼프 대통령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사실상 ‘쩐의 전쟁’인 미 대선에서 바이든 전 대통령에 비해 모금액에서 크게 뒤지고 있었다. 보수 성향 기업인들이 트럼프 지지를 망설이고 있던 것이다. 이에 스타성과 영향력은 물론 재력(포브스 기준 세계 자산 2위)까지 갖춘 머스크가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한다면 모금의 둑이 터질 거란 기대가 컸다.
지난해 12월 트럼프 대통령의 플로리다주 사저 마러라고 리조트에서 열린 파티에 참석한 머스크와 아들 X. 팜비치=AP 뉴시스 결과적으로 지난해 3월 ‘팜비치 회동’은 매우 중요한 변곡점이 됐다. 이날 만남이 둘의 미래를 바꿨다. 지난해 7월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암살 시도 직후 공개 지지를 선언한 머스크는 이제 최측근 ‘퍼스트 프렌드’가 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기업인들이 앞다퉈 구애하는 대통령이 됐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을까. 미 언론 보도와 당사자들의 발언을 토대로 지난해 3월 만남의 전후 상황을 재구성했다. 머스크의 이념적 변신도 살펴봤다.
● “내가 매치메이커였다”
‘팜비치 회동’의 전말은 NYT 보도 후 두달이 지나서야 알려졌다. 트럼프 대통령이 머스크를 직접 사저 마러라고 리조트로 초청했다는 추측도 제기됐지만, 주선자는 따로 있었다.
지난해 5월 월스트리트저널(WSJ) 보도에 따르면 둘을 ‘다시’ 이어준 인물은 월가의 유대계 억만장자 넬슨 펠츠(83)다. 펠츠는 트라이언펀드의 최고경영자(CEO)로 정치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다.
역시 팜비치에 호화 주택을 소유한 펠츠는 트럼프 대통령의 이웃이다. 그의 딸 니콜라(30)는 2022년 이 곳에서 축구 선수 데이비드 베컴의 맏아들 브루클린(26)과 결혼했다. (펠츠의 자식은 무려 열명이다.)
펠츠와 딸 니콜라(왼쪽부터). 사진 출처 니콜라 펠츠 인스타그램 펠츠를 멘토처럼 여긴 머스크는 지난해 2월 저녁 식사를 하다 ‘미 대선에 관여하고 싶다’는 취지로 말했다고 한다. 이에 펠츠가 한달 뒤 둘이 만나는 자리를 마련해준 것으로 보인다.
펠츠 본인도 자신이 ‘주선자’(matchmaker)였다고 시인했다. 지난해 11월 미 대선 이후 펠츠는 CNBC 콘퍼런스에서 “주말에 일론이 우리 집에 놀러왔고, 내가 도널드를 아침 식사에 초대했다”고 밝혔다.
● 父子 동반 모임
이렇게 성사된 ‘일요 조찬’은 부자 동반 모임이었다. 머스크는 아들 X(5)와, 트럼프 대통령은 막내 아들 배런(19)과, 펠츠는 아들 디젤(32)과 참석했다. 디젤도 머스크와 친분이 있다고 한다. 위치기반 소셜미디어와 헬스테크 스타트업 등을 창업한 이력을 바탕으로 머스크와 가까워진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 행정부에서 새로 출범한 정부효율부(DOGE) 수장을 맡은 머스크(오른쪽 두번째). 머스크가 목마 태운 아이는 5세 아들 X. 워싱턴=AP 뉴시스 당시 머스크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경제 관련 정책은 물론이고 불법 이민 대책에 관해서도 여러 가지 제안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전기차 보조금을 유지해달라는 당부도 덧붙였다. 또 트럼프 대통령의 관심사에 맞춰 대선 부정투·개표를 방지하기 위한 계획도 제안했다.
*권력의 중심지가 된 마러라고. 누가 드나들고,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는 트럼피디아 1화에서 다뤘다.
대화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이뤄졌다고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머스크를 백악관 자문역으로 정식 임명하겠다”며 화답했고 이후 그와 자주 안부 전화를 가졌다. 4건의 형사기소와 이에 따른 천문학적 법률 비용으로 재정 부담을 지고 있던 트럼프 대통령 또한 머스크 같은 억만장자의 선거 자금 지원이 절실했다.
지난해 6월 머스크는 테슬라 주주총회에서 “종종 트럼프와 통화한다. 그가 내게 전화를 걸곤 한다. 별다른 용건이 없을 때가 많고, 그는 매우 다정하다”고 말했다. 둘은 전기차와 가상화폐 등에 대해 대화했다고 한다.
● 머스크의 정치관 뒤집은 가족사
NYT에 따르면 머스크는 테슬라와 스페이스X 등 사업 대부분이 정부 계약과 보조금 영향을 크게 받아 정치색을 드러내는 일을 매우 꺼렸다. 적당히 관계를 유지해야 정권이 바뀌어도 사업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판단 때문이다.
다만 진보 보루로 꼽히는 캘리포니아주 분위기에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다. 머스크는 트럼프 대통령 1기 때 백악관 자문 그룹에 속해 있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집권 첫 해인 2017년 “파리 기후협정에서 탈퇴하겠다”고 밝히자 머스크는 “기후변화는 진짜”라고 반발하며 자문역에서 사임했고, 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이념적 변신에는 가족사가 작용했다. 캘리포니아주에서 나고 자란 큰아들 자비에가 2020년경 여성으로 성전환했고 이후 머스크와 절연한 것. 아이는 이름도 어머니의 성을 따 ‘비비안 제나 윌슨’으로 바꿨다.
이를 계기로 머스크는 진보 진영에 완전히 등을 돌렸다. ‘워크(woke·깬 의식, 진보 진영을 비꼬는 말)’를 ‘궤멸의 대상’으로 여기게 됐다. 머스크는 지난해 7월 인터뷰에서 “내 아들은 사실상 죽었다. ‘워크 정신 바이러스’가 아이를 죽였다”며 “나는 워크 정신 바이러스를 궤멸하겠다고 맹세했고, 일부 진전이 있다”고 밝혔다.
머스크는 2022년부터 공화당 지지자임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해 중간선거(상·하원을 선출하는 총선 격의 선거) 전날 그는 트위터(현 X)에 “분점정부가 되면 양당이 최악의 모습을 보여주는 일을 막을 수 있다. 대통령이 민주당 소속이니 의회 선거에서는 공화당을 뽑을 것을 추천한다”고 적었다. 완곡한 어투에 눈길이 간다.
머스크의 희망과 달리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승리했다. 민주당에 대한 반감은 커졌고 이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러나 공화당 측에 기부하면 공개가 되기 때문에 하지 않았다고 한다.
팜비치 만남 이후에 트럼프 지지로 마음이 기울었을 때도 머스크는 정식 기부나 공개 지지를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고 NYT는 전했다. 대신 우회 사격에 나섰다. 지난해 5월에는 펠츠의 팜비치 자택에 보수 성향 억만장자들을 초대해 트럼프 대통령을 지원할 것을 설득했고, 기록이 남지 않는 ‘어둠의 기부’를 할 방법을 모색했다고 한다.
지난해 10월 펜실베이니아주 유세에 나선 트럼프 대통령(왼쪽)과 머스크. 버틀러=AP 뉴시스 그러다 지난해 7월 13일 펜실베이니아주 버틀러 야외 유세에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암살 시도가 벌어졌다. 머스크는 즉시 X에 “나는 트럼프 대통령을 완전히 지지한다. 빠른 회복을 바란다”고 적었다.
암살 시도로 지지층이 결집할 것이란 예상이 우세했으나 정작 지지율 추이에는 거의 변동이 없었다. 이제와 돌아보면 머스크라는 큰 정치적 우군을 얻게 된 사건이었다.
6화 요약: 민주당의 빅테크 규제에 불만이 많던 머스크는 아들 자비에가 여성으로 성을 바꾼 후 자신과 절연하자 진보 진영의 DEI(다양성 형평성 포용성) 정책에도 반감을 품고 보수로 돌아섰다. 지난해 3월 유대계 억만장자 넬슨 펠츠를 통해 트럼프 대통령과 식사 자리를 가진 후 그와 밀착했다. 트럼프 대통령 역시 머스크의 재력이 필요했다. 같은 해 7월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암살 시도를 계기로 머스크는 ‘트럼프로의 올인’을 결심했다.
7화 예고: 트럼프 대통령은 단순히 머스크가 ‘천재’이고 1등 기부자여서 곁에 두는 것이 아니다. 머스크가 트럼프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올라선 계기를 살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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