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방’ 바레인 손 꽉 잡는 미국…‘탈중동 노선’ 바뀌나[이세형의 더 가까이 중동]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9월 17일 1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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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바레인과 안보 협력 강화 협정 체결
아프간 철군 때 부각된 탈중동 정책 수정되나
탈중동에 ‘불만’ 사우디 등 아랍 산유국 달래기에 호재
이란의 팽창, 중?러 중동 진출에 탈중동 쉽지 않아


멀게 느껴지지만 우리와 뗄 수 없는 중동. 그 생생한 현장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정치, 경제, 자원, 종교, 역사, 문화가 얽혀 있는 갈등과 변화의 ‘핫스팟’ 중동의 모습을 쉽고, 재미있게 또 인사이트를 담아 알려 드리겠습니다.

카이로특파원, 국제부 차장, 카타르의 싱크탱크 아랍조사정책연구원(ACRPS) 방문연구원으로 활동하며 중동을 취재했습니다. 단행본 <중동 라이벌리즘>과 <있는 그대로 카타르>를 펴냈습니다.
걸프만(이란에서는 페르시아만, 아랍권에서는 아라비아만으로 호칭)의 작은 섬나라 바레인이 오랜만에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바레인은 아랍 수니파 왕정 산유국의 정치‧경제협력체인 걸프협력회의(GCC) 6개 회원국(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UAE, 카타르, 쿠웨이트, 오만, 바레인) 중 가장 작은 나라다. GCC 국가 중 석유 생산량도 가장 적다.

UAE와 카타르처럼 다양한 개혁·개방 조치를 취한다거나, 월드컵과 엑스포 같은 대형 국제 행사를 유치하는 것과도 거리가 있었다. 그러다보니 그동안 바레인은 이웃 나라들에 비해 유독 ‘조용한 나라’로 여겨져 왔다. 국제사회의 시선이 집중됐던 적은 드물다.

최근 바레인에 관심이 모아졌던 이유는 미국과의 관계 때문이다. 두 나라는 13일(현지 시간) ‘전략적 안보 경제 협정’을 체결했다.

● 바레인, 미국과의 안보 협력 수준 높여
이번에 바레인과 미국이 체결한 협정에는 ‘바레인이 공격을 당하면 미국은 바레인 정부와 해당 공격에 대응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을 상의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안보 협력, 정보교류, 군사시설 이용 등을 확대한다는 내용도 담겨 있다.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부 장관(오른쪽)과 살만 빈 하마드 알 칼리파 바레인 왕세자겸 총리가 13일 미국 워싱턴의 국무부에서 ‘전략적 안보 경제 협정’에 서명하고 있다. 토니 블링컨 장관 트위터 캡처

이전에도 바레인과 미국은 가까운 사이였다. 미 해군의 제5함대가 바레인에 주둔하고 있다. 제5함대의 사령부 역시 바레인에 자리 잡고 있다. 미국은 제5함대를 통해 중동에서 발생하는 분쟁에서 해군력을 신속히 투입할 수 있다. 또 과거에는 아프가니스탄 탈레반과 이슬람국가(IS) 등을 공격할 때도 제5함대를 활용할 수 있었다.

현재 제5함대는 카타르에 있는 알 우데이드 공군기지(미 공군의 해외기지 중 가장 큰 규모)와 함께 미국의 중동 내 핵심 군사 전력으로 여겨진다.

바레인 수도 마나마에 자리잡고 있는 미 해군 제5함대 사령부. 위키피디아

결국 바레인과 미국이 맺은 협정은 안보 협력 및 보장 수준을 더욱 높이는 조치로 해석된다. 미국 백악관에 따르면 두 나라는 1년간 이번 협정에 대해 협의해 왔다. 워싱턴에서 진행된 협정 서명식에는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부 장관과 살만 빈 하마드 알 칼리파 바레인 왕세자겸 총리가 참석했다.

● 미국의 탈중동 정책과는 반대되는 조치
무엇보다, 이번에 바레인과 미국 사이에 체결된 협정을 놓고 미국의 ‘탈중동 정책’에 변화가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된다.

최근 미국은 정권마다 다소 차이가 있긴 했지만 중동에서의 역할을 줄이려는 움직임을 보여 왔다. 셰일가스의 발굴 및 기술 발전으로 미국의 중동산 석유와 천연가스 의존도가 과거에 비해 현격히 줄었기 때문이다. 또 크고 작은 중동 내 전쟁에서 미군 사상자가 꾸준히 발생한다는 것도 큰 부담이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의 탈중동 정책이 본격화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 터졌다. 바로 2021년 8월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철군이다.(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210901/109025373/1)

2001년 9월11일 ‘세계무역센터 테러(9‧11 테러)’ 직후 미국은 ‘극단주의 세력의 뿌리를 뽑겠다’는 명분아래 아프간을 공격했다. 당시 아프간은 이슬람 극단주의를 추종하는 무장 정치단체 탈레반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탈레반은 9‧11 테러의 기획자이며 테러단체 알카에다를 만든 오사마 빈 라덴을 보호하고 있었다.

2021년 8월 미군들이 아프간 철수 직전 발생한 공격으로 사망한 동료의 시신을 운구하고 있다. 중동에서 발생하는 미군 사상자는 모든 미국 정부의 큰 부담이었다. 카불=AP 뉴시스

탈레반과 20년간 전쟁(미국 역사상 가장 긴 전쟁)을 벌여온 미국이 탈레반과 협상을 통해 아프간에서 전격 철수했던 것을 감안하면 바레인과의 이번 협정은 확실히 남다른 면이 있다.

물론 사우디와 UAE 같이 영향력이 큰 나라와의 안보 협력 강화 협정이라면 더 주목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이 사우디, UAE와 많은 지향점을 공유하는 GCC 국가인 바레인과 높은 수준의 안보 협력을 지향하는 협정을 맺었다는 건 큰 의미를 지닌다.

● GCC 국가들, 미국의 탈중동 정책에 불만 커
사우디와 UAE 같이 미국에 안보를 의존했던 나라들은 미군의 아프간 철수 뒤 상대적으로 중국, 러시아와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어왔다. 과거보다 ‘미국의 경쟁자’들과의 관계 개선에 공을 들인 것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뒤 발생한 에너지난을 해결하는 데도 사우디와 UAE는 미국에 비협조적이었다. 미국의 증산 요청에 두 나라 모두 부정적으로 반응했다. 러시아에 대한 경제 제재에도 두 나라는 참여하지 않았다.

사우디와 UAE가 미국에 보인 냉랭함의 배경에는 탈중동 정책에 대한 불만이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바레인과의 안보 협력 수준을 높이는 미국의 움직임은 탈중동 정책에 불만이 컸던 다른 GCC 나라들과의 관계 개선에도 호재다.

특히 바레인은 GCC 나라들이 큰 불안감을 가지고 있는 이란으로부터의 안보 위협에 가장 심하게 노출돼 있다. 이란은 지금도 바레인은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한다. 또 바레인은 왕실은 이슬람 수니파지만, 일반 국민의 다수는 시아파다. 시아파 종주국인 이란의 영향력 확장에 더 취약한 구조다. 반면 사우디, 카타르, UAE 등은 왕실과 국민 다수가 모두 수니파다.

바레인 수도 마나마 전경. 바레인은 산유국이지만 사우디, UAE, 쿠웨이트, 카타르 등 이웃 나라들에 비해 석유 생산량이 적어 상대적으로 경제 사정이 어렵다. 또 왕실은 수니파, 국민 다수는 시아파라 종파 갈등이 벌어지기 좋은 구조다. 시아파 종주국인 이란은 바레인의 가장 큰 안보 위협이다. 이란은 바레인이 자국 영토라고 주장한다 . 바레인 경제개발처 홈페이지 캡처

또 바레인은 2010년 12월 튀니지에서 발발해 2011년과 2012년 확산됐던 ‘아랍의 봄(아랍권의 민주화 운동)’ 때 GCC 국가 중 가장 심각한 반정부 시위를 경험했다. 당시에도 이란이 바레인의 시아파 종교자들과 주요 가문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분석이 많다. 그만큼 왕실과 정부가 취약한 것. 바레인은 GCC 국가 중 석유 생산량도 가장 적다보니 경제 여건도 어려운 편이다. 아랍의 봄 당시 바레인은 사우디의 도움을 받아 겨우 반정부 시위를 진압했다.

장지향 아산정책연구원 중동센터장은 “GCC 중 가장 어려운 사정에 놓여 있는 바레인과 미국이 안보 협력 수준을 높인다는 건 향후 사우디나 UAE 달래기에도 도움이 될 수 있는 전략”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 등은 미국은 바레인과의 이번 조약이 다른 GCC 국가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고 전했다.

● ‘GCC 달래기’, 사우디-이스라엘 수교와 중‧러 견제에도 필요
‘GCC 국가 달래기’, 특히 ‘사우디 달래기’는 사우디와 이스라엘의 외교 관계 정상화를 위해서도 필요하다(UAE와 바레인은 2020년 9월 이스라엘과 외교 관계 정상화에 합의했다).

미국은 중동의 핵심 우방국인 이스라엘과 아랍의 맹주인 사우디와의 외교 관계 정상화가 자국의 중동내 영향력 유지와 이란 견제에 꼭 필요하다고 본다.

특히 내년 대선에서 재선을 노리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입장에선 ‘사우디-이스라엘 수교’는 자랑할 수 있는 큰 외교 성과다. 이를 위해선 사우디의 불만인 탈중동 정책 노선이 바뀔 수 있다는 시그널을 줄 필요가 있다.

사우디, UAE, 바레인 등 GCC 국가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 안정적으로 석유와 천연가스를 공급하는 대가로 안보를 의존해 왔다. 미국의 탈중동 정책에 대한 GCC 국가들의 불만과 걱정은 크다. 무함마드 빈 살만 알 사우드 사우디 왕세자(사진)는 최근 러시아와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 관심이 많다. 또 과거보다 미국에 덜 협조적이다. 미국의 탈중동 정책에 대한 불만이 이런 변화를 이끌어 내고 있다는 분석이 많다. 동아일보 DB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서도 이 나라들이 GCC 국가들과 계속 긴밀한 관계를 맺는 건 막아야 한다. 미국으로서는 아무리 중동의 중요성이 과거보다는 줄었다고 해도 러시아와 중국이 중동에 계속 진출하는 걸 그냥 두고 보는 건 어렵다.

러시아는 우방국 시리아를 중심으로 그동안 중동에서의 영향력을 계속 키워왔다.(https://www.donga.com/news/Inter/article/all/20230513/119276766/1)

중국도 3월 7년간 단교 상태였던 사우디와 이란의 외교 관계 정상화를 이끌어내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https://www.donga.com/news/Inter/article/all/20230312/118286632/1)

중동 국가 대사를 지낸 전직 외교관은 “미국 입장에선 에너지 자립 수준이 높아졌어도 중국과 러시아가 중동에서 존재감을 키우는 건 또다른 부담”이라며 “GCC 국가들과 계속 안보, 경제 협력을 유지하며 어떤 형태로든 중동에서의 영향력을 유지하려 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 한계 많은 조약이란 평가도 나와
미국과 바레인의 이번 협정에 한계가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안보 협력 수준을 높이는 내용임에도 GCC 국가들이 원하는 높은 수준의 안보 보장을 약속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GCC 국가들은 미국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헌장 제5조(나토 가입국에 대한 공격을 미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한다는 내용) 수준의 안보 협력을 자신들과 맺길 희망한다.

미국 싱크탱크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존 알터만 중동팀장은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바레인 협정은 이웃국가들(사우디, UAE 등 의미)이 원하는 수준에 크게 못미친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미국과 GCC 국가들과의 관계에서 이번 바레인 협정은 계속 화제가 될 전망이다. 그리고 이 나라들 간의 협상 테이블에서도 계속 거론될 것이다.

이세형 기자‧전 카이로 특파원 turt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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