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수니파 아랍국 밀착으로 탄력받는 중동판 나토 구상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3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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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현장을 가다]


임현석 카이로 특파원
임현석 카이로 특파원
《8일 이집트 수도 카이로 구시가지에 있는 벤에즈라 유대교 회당. 평일임에도 여러 관광객이 내부를 둘러보고 있었다. 히잡을 쓴 무슬림 여성도 보였다. 회당 내부에 유대교 상징물 ‘다윗의 별’이 새겨진 목걸이 등을 판매하는 곳도 있었다. 관리인은 “무슬림 관광객이 의외로 많다. 기념품도 종종 구입한다”고 말했다.》

이집트는 약 1억200만 명 인구 중 8500만 명(83%)이 무슬림인 이슬람 국가다. 수에즈 운하 소유권을 두고 영국, 이스라엘 등과 맞선 1956년 제2차 중동전쟁 당시에는 반이스라엘 감정이 극에 달해 자국 내 유대인을 추방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하지만 1970년부터 11년간 집권한 안와르 사다트 전 대통령(1918∼1981)은 국익을 이유로 적극적인 친미 노선을 폈다. 그는 미국의 중재로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맺었고 중동전쟁 당시 이스라엘이 탈환한 시나이반도를 돌려받았다. 이후 현재까지 이집트 정부는 유대인 문화를 폭넓게 인정하고 있다. 카이로, 알렉산드리아 등 주요 도시에 있는 유대교 회당을 보수하고 해외 관광객을 유치하는 데 힘쓰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 거리 두기 파장
1월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출범한 후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UAE) 등 수니파 이슬람국이 이스라엘과 부쩍 밀착하는 모습이 뚜렷하다. 전임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 때도 이런 움직임이 보였지만 바이든 행정부 출범 후 밀착 강도가 세졌다는 것이 중론이다.

이스라엘과 수니파 아랍국은 트럼프 행정부 시절 미국의 대중동 무기 판매, ‘공동의 적’ 이란 견제 등을 이유로 미국과 친밀하게 지냈다. 지난해 9, 10월 미국의 중재로 UAE, 바레인, 수단이 이스라엘과 외교 관계를 맺은 것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하지만 ‘인권’을 중시하는 바이든 행정부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핍박, 수니파 이슬람 국가의 자국 내 반대파 탄압 등을 모두 문제 삼으며 양쪽 모두에게 거리를 두자 연대를 통해 현 상황을 돌파하려 한다는 의미다. 특히 바이든 행정부가 전임 트럼프 행정부에서 파기했던 이란 핵합의(JCPOA)를 복원하겠다고 공언한 것은 양측의 밀착을 가속화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바이든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부터 사우디와 UAE가 예멘 정부군을 편들며 내전에 개입하는 것을 반대했다. 두 나라가 시아파 반군 후티와 대결한다는 명목으로 예멘 공습을 감행하는 바람에 수많은 민간인이 학살됐다는 이유에서다. 이에 트럼프 행정부 시절 추진했던 사우디와 UAE에 대한 최신식 무기 판매를 재검토하고 있다. 후티에 대한 테러조직 지정 계획을 철회했고 2018년 10월 암살된 사우디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사건 배후로 실권자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를 지목했다. 모두 트럼프 행정부 시절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다. 미국은 3월 유엔인권이사회에서 이집트 반체제 언론인 및 인권단체 탄압 중단을 요구하는 31개국 공동 성명서에도 서명했다.

국내 정치 혼란 돌파용 新협력
8일 이집트 수도 카이로 구시가지에 있는 벤에즈라 유대교 회당에서 관광객이 내부 시설을 둘러보고 있다. 이집트 정부는 1979년 이스라엘과 국교 정상화 이후 유대교 회당 건물 보수 지원 등 유대 문화에 관대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카이로=임현석 특파원 lhs@donga.com
8일 이집트 수도 카이로 구시가지에 있는 벤에즈라 유대교 회당에서 관광객이 내부 시설을 둘러보고 있다. 이집트 정부는 1979년 이스라엘과 국교 정상화 이후 유대교 회당 건물 보수 지원 등 유대 문화에 관대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카이로=임현석 특파원 lhs@donga.com
양측의 자국 정치 현황 또한 서로의 밀착을 부추기고 있다. 23일 총선을 앞둔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전체 인구 930만 명 중 약 20%인 아랍계 유권자의 지지가 절실하다. 이스라엘 역사상 최장수 총리인 그는 1996∼1999년, 2009년∼현재까지 총리직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2018년 12월 연립정부가 붕괴한 후 집권 리쿠드당을 비롯한 어느 정당도 과반 의석을 확보하지 못해 이후 3차례나 총선을 치를 정도로 정치 혼란이 극심하다. 네타냐후는 지난해 4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응에 힘을 합쳐야 한다는 명분으로 중도정당 청백당의 베니 간츠 대표를 끌어들여 가까스로 재집권에 성공했다. 하지만 지난해 12월 예산안 처리에 실패하면서 연정이 깨졌고 23일 최근 2년간 네 번째인 총선을 치른다.

특히 네타냐후 총리는 할리우드 영화제작자 등에게 수십만 달러 상당의 선물을 받은 혐의 등을 받아 2019년 11월 현직 총리 최초로 뇌물수수, 배임, 사기 등의 혐의로 기소됐다. 이 재판이 진행 중이어서 총선에서 패하면 곧바로 교도소에 갇힐 수도 있다.

집권 내내 자국 내 팔레스타인계를 거세게 탄압했던 그는 올해 1월엔 아랍계 밀집지역인 북부 나사렛을 찾았다. 현직 총리 최초로 UAE 방문도 추진하고 있다. 9일 라디오 방송에서 “재집권하면 역내 국가와 더 많은 평화 협정을 맺겠다”고 공언하며 아랍권에 계속 유화 제스처를 보낼 뜻을 밝혔다.

아랍국 또한 이스라엘의 뛰어난 첩보 능력이 절실하다. 특히 ‘세계 최고 정보기관’이란 평을 얻고 있는 모사드의 힘을 빌려 자국 내 반대파를 견제하고 왕정 체제를 유지하겠다는 속내가 뚜렷하다. 바레인이 대표적이다. 왕실은 수니파, 국민 대다수는 시아파여서 왕실 측에서 사회 통제 목적으로 모사드의 힘을 빌리려 한다는 관측이 나온다. 지난해 10월 요시 코헨 모사드 국장은 바레인을 찾아 양국 정보기관 협력을 논의했다.

모사드는 사우디와 UAE 등에 후티, 헤즈볼라 등 이란이 후원하는 시아파 반군에 관한 각종 정보를 넘겨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니파 왕정국은 이란식 이슬람 공화제 모델이 왕정을 위협할 것으로 보고 관련 정보를 수집하는 데 필사적이다. 뉴욕타임스(NYT)는 모사드를 통한 이스라엘과 아랍국의 물밑 협력이 지난해 UAE, 바레인과 이스라엘 수교의 밑바탕이 됐다고 진단했다.

로이터통신 등은 무함마드 사우디 왕세자, 네타냐후 총리가 지난해 11월 사우디 서부 네옴에서 비밀 회담을 가졌으며 마이크 폼페이오 당시 미 국무장관도 참석했다고 보도했다. 무함마드 왕세자가 2017년 이스라엘 보안업체 NSO그룹으로부터 정부 승인 없이 해외 판매가 불가능한 스마트폰 해킹 스파이웨어를 약 550만 달러(62억 원)에 구입해 반체제 인사들을 지속적으로 감시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이스라엘-아랍 군사협력 가능성
이런 분위기를 바탕으로 최근 중동 매체들은 ‘중동판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창설 가능성을 집중 거론하고 있다. 2일 베니 간츠 이스라엘 국방장관은 “이란에 대한 우려를 공유하는 중동 걸프국과 특별 안보협정을 맺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며 이스라엘과 아랍국의 군사 협력 가능성을 시사했다.

양측의 군사 협력 가능성은 오래전부터 제기됐다. 2017년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사우디 UAE 바레인 카타르 등 중동 수니파 국가와 이스라엘이 반이란 군사 동맹을 추진한다고 보도했다. 2017년 6월 사우디가 카타르의 친이란 성향을 문제 삼아 단교에 나서면서 논의가 지지부진했지만 바이든 행정부 출범 후 다시 물밑 접촉이 이뤄지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장지향 아산정책연구원 중동센터장은 “미국의 지지가 예전 같지 않다고 느끼는 수니파 군주국과 이스라엘이 일종의 자력갱생에 나설 수 있다는 의미”라고 분석했다.

임현석 카이로 특파원 lhs@donga.com
#이스라엘#수니파#아랍국#중동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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