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정부, 직접 나서서 ‘채소가게’ 차린 까닭은

13일 터키 이스탄불의 정부 운영 채소가게에서 시민들이 물건을 사려고 길게 줄서고 있다. 선거를 앞두고 채소 가격이 지난해보다 두 배 이상 오르자 터키 정부는 성난 민심을 돌리려고 직접 채소가게를 차렸다. 출처 휘리예트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3월 말 지방 선거를 앞두고 껑충 뛴 장바구니 물가로 고심하고 있다. ‘금값 채소’가 지지율 하락으로 이어지진 않을까라는 걱정이 급기야 정부가 직접 ‘채소가게’까지 차리는 상황까지 이어졌다.

아랍권 방송 알자지라 등은 13일 터키 정부가 이스탄불에 직접 개설한 채소가게를 집중 조명했다. 이 야채가게는 시중보다 절반 가까이 싼 가격으로 채소를 살 수 있어 주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길게 늘어선 줄도 흔한 풍경이다. 한 시간 넘게 기다린 뒤에야 살 수 있는 채소는 최대 3㎏.

터키 통계연구소에 따르면 1월 토마토와 고추, 가지 등 신선식품 가격은 전년 동기 대비 최대 두 배까지 올랐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달 초 “몇몇 도매상들이 시장가격을 조장하고 있다. 마치 게임을 하듯 가격을 올리는 것은 ‘사회적 테러’나 마찬가지”라고 비난했다. 지난달 터키 정부는 신선식품 유통을 대대적으로 점검해 88개 업체에 벌금 38만 달러(약 4억2800만 원)를 매길 정도로 가격 안정에 고심하고 있다.

채소 중개상인들은 “정치적 이익을 위한 모함”이라며 반발했다. 채소 가격 상승은 안탈리아 등 터키 주요 생산지에서 발생한 태풍, 장마 등으로 인한 농작물 수확량 감소 때문인데 애꿎은 중개상만 몰아세운다는 것이다. 한 도매상은 현지 아흐발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지난 달 내내 내린 비와 태풍으로 농작물이 큰 피해를 입었다”며 “공급이 줄었으니 가격상승은 당연하다. 누명을 씌우고 있다”고 반발했다. 수도 앙카라를 포함해 주요 도시 선거에서 여당이 고전할 것이란 예측이 계속 이어지자 터키 정부는 아예 한술 더 뜰 계획이다. 민심을 돌리기 위해 쌀과 콩, 청소용품 등 곡물과 생활필수품도 가격이 오르면 직접 판매하기로 했다.

시민 반응은 뜨뜻미지근하다. 에르도안 대통령과 여당인 정의개발당(AKP)이 표심을 노리고 벌이는 ‘정치적 쇼’에 불과하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터키 정부는 “이 프로젝트는 소비자가 필요로 할 때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밝혔지만 11일 정부 운영 채소가게에서 가지, 시금치 등을 산 주부 네바하트 데니즈는 “선거가 끝난 뒤에도 이런 정책이 유지될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터키 야당들은 정부가 지자체에 ‘반값’ 채소가게를 열라고 압박하고 있으며 여기서 발생하는 손실을 세금으로 메우고 있다고 비난했다.

터키 안팎에서는 에르도안 대통령이 16년 장기집권 중 가장 힘든 시간을 지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각종 경제지표에서도 이 같은 어려움이 드러난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터키 경제성장률이 0.4%에 그칠 것으로 예상했다. 지난달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정부 목표(5%)를 훌쩍 넘는 20.4%를 기록했고 실업률도 10%를 넘어섰다. 2023년까지 터키 경제를 세계 10위권에 올려놓겠다는 에르도안 대통령의 공약이 물거품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단기간에 풀기 어려운 경제로 곤혹을 치르던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젠 외교, 대테러 등 다른 이슈에 집중하며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는 최근 “터키는 지금도 전쟁 중이다. 수많은 테러리스트들과 벌이는 전쟁을 잊어서는 안 된다”라며 “식품가격 상승 등을 이유로 정부를 비난하는 것은 나라를 망치려는 세력들이 벌이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카이로=서동일 특파원 d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