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미투 첫발뗀 여기자 “한국 배울게 많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4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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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성폭행 피해 폭로 이토 시오리

프리랜서 저널리스트인 이토 시오리 씨가 6일 도쿄에서 동아일보와 인터뷰를 하며 자신이 당했던 일과 이후 경과를 설명하고 있다. 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프리랜서 저널리스트인 이토 시오리 씨가 6일 도쿄에서 동아일보와 인터뷰를 하며 자신이 당했던 일과 이후 경과를 설명하고 있다. 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6일 오전 일본 도쿄(東京) 지요다(千代田)구.

약속 장소에는 두꺼운 안경을 쓰고 머리를 묶은 여성이 있었다. 자료에서 본 모습과 전혀 달랐다.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이토 시오리(伊藤詩織·29) 씨는 “얼굴을 알아볼까 봐 일본에 오면 이렇게 다닌다”고 했다.

그는 지난해 5월 기자회견을 열고 성폭행 피해 사실을 폭로했다. 폐쇄적인 일본에서 성폭행 피해자가 실명 기자회견을 연 첫 사례다. 이토 씨는 2015년 4월 야마구치 노리유키(山口敬之) 당시 TBS 워싱턴지국장과 도쿄에서 취업 상담을 위해 만나 식사 후 의식을 잃고 피해를 당했다. 이토 씨는 당시 상황에 대해 “내 의지로 호텔에 가지 않았고 합의도 없었다. 명백한 성폭행”이라고 밝혔다.

사건 직후 상담센터에 전화했지만 “직접 찾아와야 상담이 가능하다”는 말에 포기했다. 일본 경찰에도 도움을 요청했지만 “자주 있는 일이라 수사가 어렵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그는 “데이트 강간약 사용이 의심됐지만 지원을 받지 못해 초기 증거가 사라졌다”고 했다.

저널리스트 지망생이던 이토 씨는 ‘스스로 진실과 마주하지 못하면서 언론인이 될 자격이 있을까’라는 생각에 경찰에 피해신고를 하기로 결심했다. 일본에서 성폭행 피해자의 신고 비율은 4%에 불과하다.

경찰이 조사에 나서면서 사건 당일 의식을 잃은 이토 씨를 야마구치 지국장이 안고 가는 호텔 폐쇄회로(CC)TV 장면이 발견됐다. 경찰은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신병 확보에 나섰다. 그런데 막판에 경찰 고위 간부에 의해 직권 취소됐다. 이토 씨는 “현장에 수사관이 대기 중인 상황에서 법원이 발급한 체포영장이 취소된 건 전대미문”이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와 가까운 야마구치 지국장의 영향력 때문이라는 의혹이 제기됐지만 경찰은 침묵을 지켰다.

수사 과정에서 이토 씨는 남성 수사관 앞에서 인형을 상대로 당시 상황을 재현해야 했다. 수사관들이 돌아가면서 “처녀냐”고 묻는 등 상식 이하의 대우도 당했다. 불기소 결정이 나자 이토 씨는 검찰위원회에 이의를 제기했지만 기각됐다.

이토 씨는 “일본 언론도 냉담했다. 결국 마지막 수단으로 지난해 5월 실명 기자회견을 열었다”고 했다. 지난해 10월에는 자신의 성폭행 피해 사실과 그 이후 일본의 반응을 다룬 책 ‘블랙박스’를 내고 주일 특파원협회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실명 증언의 대가는 컸다. 인터넷에는 ‘일본의 수치’라는 등의 비판과 협박이 쏟아졌다. 혐한(嫌韓) 세력을 중심으로 한국계라는 근거 없는 루머까지 나왔다. 그는 “가족과 친구 사진이 인터넷에 돌아다녔다. 꽃뱀이라는 소문 때문에 언론사에서 일하기도 어려워 결국 영국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고 했다. TBS는 나왔지만 여전히 언론인으로 활동 중인 야마구치 측과는 민사소송을 진행 중이다.

이토 씨의 기자회견 이후 일본에서 ‘미투(#MeToo·나도 당했다)’ 폭로들이 나왔지만 한국이나 미국처럼 큰 흐름을 형성하진 못했다. 지난달 유엔에서 기자회견을 한 이토 씨는 “사회적 압력이 강한 일본은 내부로부터 바뀌기 어렵기 때문에 유엔이나 해외 미디어를 활용하는 게 중요하다”며 “미투 운동이 활발한 한국에서 배울 게 많다”고 했다. 최근 뜻을 같이하는 이들과 주변에서 폭력을 방관하지 말자는 ‘위투(WeToo)’ 캠페인도 시작했다.

이토 씨는 자신과 유사한 일을 당한 피해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꼭 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일단 자신을 믿으세요. 지금은 미약하고 반향이 없더라도, 당신의 말이 반드시 나중에 중요한 목소리로 세상에 받아들여질 때가 올 겁니다.”

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일본 미투#성폭행 피해자 실명 기자회견#위투 캠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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