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패션업계 ‘미다스의 손’ 퍼트리샤 필드 씨의 스타일링은 수많은 유행과 새로운 스타들을 탄생시켜 왔다. 그는 “세계적 팝스타 비욘세(34)는 10대 때부터 단골 고객”이라며 “내 성공은 스타일링에 대한 애정과 열정, 그 안에서 형성된 인간관계가 결합하면서 성취된 것”이라고 말했다. 나이를 무색하게 하는 빨간 머리와 안경은 그의 특유의 스타일. 뉴욕=부형권 특파원 bookum90@donga.com
퍼트리샤 필드(74). 그의 직업을 한 가지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흔히 ‘세계적 스타일리스트’라는 수식어가 붙지만 의상 디자이너, 패션 디자이너, 의상 감독이기도 하다. ‘패션 아티스트(예술가)’라고도 불린다. 그의 이름을 활용해 “필드(Field)는 패션업계의 새로운 필드(field·영역)를 구축했다”는 평가도 듣는다. 그의 스타일링은 수많은 유행을 만들어 냈다. 수십 년째 패션업계 ‘미다스의 손’이다. 그는 명품 브랜드, 유명 디자이너 등 ‘이름’만 보고 의상이나 액세서리를 선택하지 않는다. 작품 속 배우의 역할과 전체적인 스토리라인을 철저히 연구해 그에 맞는 스타일을 머릿속에 그린 뒤 각종 매장을 누비며 ‘실물’을 찾아낸다. 그의 눈에 들어 ‘캐스팅’되면 값싼 길거리 상품도 금방 글로벌 트렌드로 올라간다.
그는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얻었던 ‘미드’(미국 드라마) ‘섹스 앤드 더 시티’의 의상 감독으로 활약했다. 연기파 배우 메릴 스트립의 화려한 변신이 화제였던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도 의상 감독을 맡아 이름을 날렸다.
그런데 그는 너무 바쁘다. 지난해 10월 한국 디자이너들을 위한 뉴욕 패션쇼 ‘콘셉트 코리아’에서 첫 인사를 나눈 뒤 단독 인터뷰 시간을 마련하는 데까지 ‘100일 정성’이 필요했다. 지난달 16일 오전(현지 시간)에야 뉴욕 맨해튼 바워리호텔 커피숍에서 그를 따로 만날 수 있었다. 그날은 영하 15도, 혹한의 날씨였지만 그는 특유의 민소매와 토시 차림이었다. 빨간 머리와 빨간 뿔테 안경은 74세 나이를 무색게 했다.
“스타일리스트가 되고 싶다면 먼저 스타일링을 해라” ―당신은 정상의 스타일리스트다. 무엇이 당신을 이 자리에 오르게 했나.
“20대 중반이던 1960년대 맨해튼에서 작은 의상실을 개업했다. 찾아온 손님에게 그냥 옷만 파는 게 아니라, 그 손님의 취향을 파악해 최대한 맞는 옷과 장신구를 찾아서 스타일링해 줬다. 그랬더니 손님들이 ‘마음에 든다. 고맙다’며 다시 가게를 찾아왔다. 그 20년이 내 스타일링 인생의 큰 토대가 됐다. 1980년대 중반부터 영화 의상 작업을 하게 됐는데 초반 (20년의) 경험이 내내 많은 도움을 줬다.”
그는 요즘도 맨해튼 자신의 매장에 하루 종일 머물며 손님들의 취향을 살리고, 그들이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엿듣는 걸 즐긴다고 했다. 그 나름의 ‘고객 탐구’ ‘세상 탐색’을 끊임없이 한다는 것이다.
―뉴욕 파리 런던 등 주요 패션 도시마다 팬클럽이 있을 정도다. ‘제2, 제3의 퍼트리샤 필드’가 되려는 젊은이가 많다고 들었다.
“고맙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 중 상당수는 나를 만나자마자 ‘당신의 조수가 되고 싶다’ ‘(화려한) 패션쇼에 데려다 달라’고 요구한다. 그때마다 나는 ‘스타일리스트가 되고 싶으면 시간과 장소와 상황을 가리지 말고 스타일링을 먼저 해라’라고 조언한다. 고객을 연구하고 그들과의 관계를 만들어 가라고 한다. 그것이 스타일리스트로 성장해 가는 유일한 길이다. 내가 작은 옷가게에서 20여 년간 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는 “(나처럼) 성공하고 싶다면 자기 일을 내 배우자나 내 아이처럼 사랑하면 된다”고 강조했다. “부모는 아이가 배고프지 않은지, 춥지 않은지 끊임없이 살피고 챙기지 않느냐. 내 일(career)도 그렇게 사랑하면 된다. 외부 환경이 좋고 나쁘고, 트렌드가 어떻게 변하고는 신경 쓰지 마라. 내가 지금 내 일을 사랑하고 있는지만 생각하라”고 덧붙였다. 일을 사랑하면 돈은 저절로 따라온다는 얘기가 이어졌다.
“나는 돈이 아닌 성취감 때문에 일한다(I am motivated by achievement). 영화 의상 일을 맡게 되면서 스타일링을 마음껏 할 수 있어 정말 행복했다. 돈도 (내 의상실에선) 만져 보지 못했던 액수를 주더라. 얼마나 좋고 고마운 일인가.”
‘패션 감각 없는 연기파 배우’로 평가 받던 메릴 스트립(오른쪽)은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지적인 섹시미의 상징’으로 파격 변신했다. 필드 씨의 철저한 ‘사람 탐구’ 스타일링의 결과였다. 동아일보DB제시카 파커의 ‘튀튀’와 메릴 스트립의 ‘화이트’
필드 씨가 가장 싫어하는 후배 스타일리스트나 의상 디자이너는 ‘유행이다’ 또는 ‘유명 브랜드다’는 이유만으로 드라마나 영화 속 캐릭터와 아무 상관없는 옷을 ‘아무 생각 없이’ 입히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는 “스타일링을 잘하려면 그 배우의 몸, 사고방식, 생활습관까지 철저히 연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006년)에서 배우 메릴 스트립을 ‘지적인 섹시함의 대명사’로 탈바꿈시킨 것도 당신의 작품이다.
“나는 메릴 스트립을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그래서 먼저 그녀를 알아야 했다. 집으로 가서 서너 시간 대화를 나눴고 허락을 받고 개인 서랍장까지 다 열어 봤다. 내 결론은 ‘이 여자는 깎아 놓은 인형(a cut out doll)이 아니라 진정한 배우(an actor)’라는 것이었다. ‘그냥 메릴 스트립이 아니다(She is not Meryl Streep for no reason)’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그녀를 아주 멋지게(gorgeous) 만들고 싶었다. 그녀의 팬들을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다.”
‘메릴 스트립은 어떤 배역도 소화하는 멋진 배우다. 그런데 외모도 멋지게 하고 다닐 수 없나?’라는 팬들의 아쉬움을 한 방에 날려 버렸다는 얘기다. 당시 메릴 스트립의 머리 색깔을 흰색으로 할지 말지를 놓고 디자이너들과 제작진의 생각이 맞섰다고 한다. 영화감독은 “흰색으로 하면 너무 늙어 보인다. 필드 씨가 헤어 디자이너 등을 말려 달라”고 요청했을 정도. 그러나 그는 “메릴 스트립의 흰색 머리에 다양한 스타일링을 할 수 있겠다는 영감이 들었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됐기 때문에 자신이 있었다”고 말했다. 결국 흰색이 관철됐고 영화가 개봉되자 ‘차가운 섹시미로 무장한, 새로운 메릴 스트립이 탄생했다’는 호평이 쏟아졌다.
‘섹스 앤드 더 시티’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필드 씨가 “주인공 캐리(세라 제시카 파커)에게 짧은 발레복 ‘튀튀(tutu)’를 평상복으로 만들어 입히겠다”고 하자 감독과 스태프가 모두 반대했다. “상식적이지 않고, 너무 이상할 것 같다”는 이유를 댔다.
―실제로 상당한 파격이었다. 어떻게 그런 시도를 했나.
“제시카 파커를 매우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예전에 발레를 했다. 춤추는 걸 좋아한다. 가벼우면서도 공주 같은 이미지를 주는 튀튀 드레스는 파커의 율동감 있는 몸짓과 완벽한 조화를 이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반대했던 감독(대런 스타)이 ‘튀튀 입은 캐리’ 사진을 자신의 스튜디오 벽에 자랑스럽게 전시해 놓고 있다.”(웃음)
필드식 스타일링의 힘은 결국 끊임없는 사람 탐구에서 나온다는 생각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멋져 보이고 싶은가? 돈만 쓰지 말고, 자신부터 파악하라
―‘섹스 앤드 더 시티’나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배우들처럼 멋져 보이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동아일보 독자들에게 생활 속 스타일링의 팁을 준다면….
“먼저 ‘멋져 보인다’는 기준을 다른 사람의 눈에 맞추지 마라. ‘어떻게 멋지게 보일까’의 문제는 내 자신을 탐구해서 나만의 스타일을 찾아내야 풀린다. 스스로 재미있고 지적이고 인간적이고 힘 있고 자신감 있다고 생각되면 그 사람은 분명 (타인에게도) 멋져 보일 것이다.”
그는 특히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비싼 옷을 입었다고 멋져 보이는 게 결코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아무 멋이나 매력 없이 그저 수천만 원짜리 옷을 걸치고 있네’라는 인상을 주는 유명인이나 부자가 많다고 했다.
“온몸을 치장하는 데 50만 달러(약 5억6500만 원)도 대수롭지 않게 쓰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돈을 써도 전혀 안 멋진 경우가 있고, 몇 십 달러(몇 만 원)짜리 옷이라도 자기 스타일과 딱 맞게 입어서 정말 멋진 사람이 있다. 돈으로 스타일을 살 수는 없다(Money cannot buy style). 그 대신 자기만의 스타일 찾기에 ‘관심’을 가져라.”
필드 씨는 인터뷰 도중 여러 차례 “한국의 열정, 한국의 에너지를 무척 사랑한다”고 말했다. 특히 밤새 일하는 동대문시장과 한국 사람들을 볼 때마다 ‘한국은 24시간 잠들지 않고 살아 숨쉬는 나라’라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동대문을 보면 “나도 재충전되는 기운을 받는다”고 말했다.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는….
“편안함(comfort)은 젊은이들에겐 독이다. 젊은 세대가 편안함에 빠져 노력하지 않는 나라는 내리막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한국인들의 성실함을 볼 때마다 ‘한국은 더 높게 올라갈 자격이 충분히 있는 나라’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시트콤 ‘섹스 앤드 더 시티’의 세계적 히트엔 주인공 4명의 개성 있는 스타일이 큰 몫을 했다. 의상 감독이었던 필드 씨는 배우와 배역을 자연스럽게 일치시켰다는 찬사를 받았다. 왼쪽부터 ‘샬럿’ ‘캐리’ ‘서맨사’ ‘미란다’. 동아일보DB▼“화려한 변덕쟁이 캐리, 딱 며느릿감 샬럿…”▼
필드 씨가 말하는 ‘섹스 앤드 더 시티’ 주인공들
미국 뉴욕 전문직 여성 4명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 시트콤 ‘섹스 앤드 더 시티(Sex and the City·1998년 6월
6일∼2004년 2월 22일 방영)’는 하나의 문화 현상을 낳았다. 세계의 많은 여성 시청자들이 섹스 칼럼니스트 ‘캐리’(세라
제시카 파커), 홍보이사 ‘서맨사’(킴 캐트럴), 큐레이터 ‘샬럿’(크리스틴 데이비스), 변호사 ‘미란다’(신시아 닉슨)의 패션
스타일을 따라 했다. 방송과 패션업계에선 “이 시트콤은 역사상 가장 강력한 트렌드 세터”라는 찬사를 쏟아냈다.
네 주인공의 ‘머리에서 발끝까지’를 책임졌던 퍼트리샤 필드 씨에게 “네 주인공의 스타일을 표현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극중 인물 캐릭터와 실제 배우 성격을 집어내며 이야기를 풀어갔다.
“캐리는 그야말로 패셔니스타다. 그 성격은 변덕스럽다(mercurial). 오르락내리락(up and down) 한다. 때론 자신감이 넘치다가 때론 불안해한다. 그 모든 면에서 캐리가 곧 파커이고, 파커가 곧 캐리다.”
이어 그는 “서맨사는 한마디로 ‘섹스 봄’(sex bomb·섹스어필 하는 육체파 여성)이다. 그녀는 섹시하길 원하고 남자들로부터
사랑받기(being adored)를 원한다. 자기가 정한 삶의 원칙으로 인생을 살아간다. 그녀의 정신세계와 성격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바로 파워”라고 덧붙였다.
‘보수적 이미지’의 샬럿은 어떨까. 필드 씨는 “남자들이 집에 계신
엄마에게 데려가야 할 여자다. 엄마들이 ‘내 아들을 위해 원하는 바로 그 여자’”라고 표현했다. 이어 “고전적이고 착하고 예쁘다.
엄마들은 그런 여자를 (며느리로) 원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미란다는 가장 불안정한 성격이다. 자신을 꾸미거나 자신만의 스타일을 개발하는 데도 소극적이다. 하지만 지적(知的)이면서 마음도 따뜻하고 친구나 주위 사람을 많이 신경 쓰고, 가장 잘 챙긴다”고 말했다.
뉴욕 패션업계 관계자들은 “필드 씨는 배우의 원래 성격이나 스타일을 철저히 탐구해 그에 맞는 의상과 소품으로 극중 역할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게 하는 특별한 능력의 소유자”라고 평가했다. 뉴욕=부형권 특파원 bookum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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