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5세대 지도부 인물-리더십 집중탐구]<7> 왕치산, 배짱-소신의 ‘소방대장’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1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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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스-금융위기 확산 차단 진두지휘
부패척결 임무 맡은 ‘리틀 주룽지’

“매우 뛰어난 재능이 있다. 아주 대담하고 유능하다.”

중국 공산당 왕치산(王岐山·64)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겸 중앙기율검사위원회(중앙기율위) 서기에 대해 리콴유(李光耀) 전 싱가포르 총리는 이렇게 극찬했다고 한다. 왕 서기는 혁명 원로의 자제가 아니지만 태자당으로 분류되고, 칭화(淸華)대를 졸업하지 않았지만 칭화대 동문을 지칭하는 칭화방이기도 하다. 최근 15년간 중국의 큰 위기 해결에 큰 활약을 했다. 이제 부패를 척결해 공산당을 구하라는 막중한 임무가 그에게 부여됐다.

○ 태자당 사위가 된 국민당 군인의 아들

왕 서기는 1948년 7월 산둥(山東) 성 칭다오(靑島)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국민당 군 장교였으나 대만으로 철수하지 않고 칭다오에 남았다가 베이징 건설부에서 고급 공정사로 일했다고 홍콩 언론은 전한다.


1969년 21세인 그는 산시(陝西) 성 옌안(延安) 핑좡(憑莊)공사로 하방되면서 운명의 전환점을 맞는다. 여기서 문화대혁명으로 밀려났다가 나중에 부총리를 지낸 야오이린(姚依林) 일가를 알게 됐다. 이후 야오의 딸 야오밍산(姚明珊)과 결혼했다. 장인 덕택에 태자당이 됐다.

장인의 후광으로 1982년 공산당 싱크탱크 중 하나인 중앙서기처 농촌정책연구실로 들어가 농업 전문가가 됐다. 1983년 35세로 공산당에 정식 가입했다. 다른 상무위원보다 한참 늦다. 그는 1980년대 경제학자 3명과 함께 정부에 증권시장 설립을 주장하는 글을 올려 채택됐다. 현재 중국 증권시장의 출발점이었다.

1988년 중국농촌신탁투자공사 총경리로 근무하면서 금융계에 투신했다. 그는 중국인민건설은행장, 중국건설은행장을 역임하면서 1997년까지 금융계를 주름잡았다. 이어 광둥(廣東) 성 부성장, 베이징(北京) 시장 등을 거쳤다. 역사, 농업 연구에서 금융계와 지방 지도자까지 전혀 다른 업무 영역을 넘나들었다.

○ 탁월한 업적 속에 빛나는 별명

문제가 생긴 곳마다 투입돼 성공적으로 해결한 그의 별명은 ‘소방대장’. 1997년 금융위기에 빠진 광둥 성을, 2003년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로 혼란에 빠진 베이징을 구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에 중국이 휩쓸리는 것도 막았다. 또 위안화의 국제화에 초석을 놓았고 미국과의 무역 갈등을 슬기롭게 처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 다른 별명은 ‘리틀 주룽지(朱鎔基)’. 주 전 총리의 배짱과 소신까지 닮았다고 해서 생겼고 실제로도 그의 각별한 총애를 받고 있다. 그가 칭화방으로 분류되는 것은 칭화대 경제관리학원 겸임교수를 지냈고 장인도 칭화대 출신이기 때문이다.

왕치산은 이번에는 당의 부패 척결을 위한 선봉장으로 발탁됐다. 중앙기율위는 당내 사정을 총괄하는 기구다. 왕 서기는 19일 베이징에서 중앙기율위 회의를 열었다. 중앙기율위는 “향후 고위층의 부정부패를 엄중하게 다스리고 효과적으로 예방하는 시스템을 확고하게 갖춰나갈 것”이라며 “당과 국가의 운명이 걸린 엄중한 정치투쟁”이라고 밝혔다. 그가 새로운 업무에서도 과거처럼 뛰어난 활약을 펼칠 수 있을지 주목된다.

○ 서방과의 원만한 관계

중화권 매체는 그가 착실하고 겸손하며 세심하다고 평가한다. 개혁 성향이 강하고 유머감각도 좋다. 개방적인 그가 부총리를 맡아 서방 매체에 중국 경제 뉴스가 많아졌다는 얘기도 나온다. 2009년부터 미중 양국이 매년 개최하는 ‘전략과 경제대화’의 중국 측 대표를 맡고 있다.

2009년 7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미중 전략경제대화에서 기념 촬영을 마치고 출구 반대 방향으로 향하던 왕치산 중국 부총리(왼쪽)를 티머시 가이트너 미국 재무장관이 손을 뻗어 붙잡고 있다. 워싱턴=로이터 연합뉴스
2009년 7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미중 전략경제대화에서 기념 촬영을 마치고 출구 반대 방향으로 향하던 왕치산 중국 부총리(왼쪽)를 티머시 가이트너 미국 재무장관이 손을 뻗어 붙잡고 있다. 워싱턴=로이터 연합뉴스
협상 파트너인 티머시 가이트너 미 재무장관과는 말이 잘 통했다. 그가 2010년 미국을 방문해 13세 연하인 가이트너 장관에게 돌연 “나와 당신 아버지는 친구다. 나를 삼촌이라 불러야 한다”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가이트너 장관의 부친은 포드재단의 첫 중국대표였고 1980년대에 왕 부총리를 알았다고 한다. 당시 일부 미 매체는 왕 부총리를 ‘왕 삼촌’이라고 호칭했다고 홍콩 언론이 전했다.

베이징=이헌진 특파원 mungchi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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