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레드셔츠, 섬뜩한 ‘혈액투척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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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3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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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서 2만명에 275L 채혈정부청사-집권당 당사에 뿌려“국회해산 거부땐 또 뿌릴것”

태국 반정부 시위대가 16일 의회 해산과 조기 총선을 요구하며 정부청사 주변에 시위대의 피를 뿌리는 ‘혈액 투척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정부가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며 음료수 페트병에 모은 피를 정부청사와 집권 여당인 민주당 당사 등에 뿌렸다.

부패 혐의로 해외 도피 중인 탁신 친나왓 전 태국 총리를 지지하는 ‘독재저항민주주의연합전선(UDD·일명 레드셔츠)’ 회원들은 이날 시위에 앞서 거리 곳곳에서 피를 뽑았다. 시위 주도자들은 “정부가 국회를 해산하라는 시위대의 요구를 거절한다면 다시 100만 cc의 피를 모아 뿌릴 것”이라고 말했다.

▽도로를 물들인 선혈
=오후 5시경 피가 담긴 대형 플라스틱 병을 든 UDD 지도자들이 수만 명의 시위대와 함께 정부청사 앞에 나타났다. 진압 복장을 한 경찰 2000여 명이 정부 청사 앞 도로를 겹겹이 막아섰다. 경찰은 지도부만 진압선 안쪽의 청사 입구에 들어가도록 허용했다. 물리적 충돌은 없었다.

승려들이 진행한 이른바 ‘저주의 의식’이 끝난 뒤 저지선을 통과한 지도자 50여 명은 경찰이 묵묵히 지켜보는 가운데 청사의 철문 입구 여섯 곳과 도로에 피를 뿌렸다. 시뻘건 피가 쏟아지자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시위대가 깃발을 흔들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이어 민주당 당사 등지로 이동해 같은 혈액 투척 퍼포먼스를 벌였다. 이날 뿌려진 피의 양은 플라스틱병 50개에 275L가량이다. 친(親)탁신파 국회의원 60명이 보내온 피 2000cc도 포함됐다. 시위대 국제담당 대변인 센 본프라쿵 씨는 “2만 명에게서 채혈했다”며 “이 양이면 정부청사 등에 뿌리고도 남을 정도”라고 했다.

현장에서 만난 송 폰 씨(42)는 피를 뽑은 팔뚝의 주삿바늘 자국을 보여주면서 “민주주의를 위해 피를 바쳤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며 “아피싯 웨차치와 총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정치를 하지 않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앞서 오전 8시부터 시작된 채혈 캠페인에는 붉은 셔츠를 입은 시위대들이 일찍부터 몰려들었다. 지도부는 500여 명의 의사와 간호사 등을 동원해 거리에 대형 텐트를 쳐놓고 생수병에 피를 모았다. 레드셔츠 지도자인 비라 무시카퐁 씨가 가장 먼저 자신의 피를 뽑고 “우리의 피로 더러운 정부를 씻어내자”며 동참을 호소했다. 이어 시위대 2만여 명이 각자 10∼200cc의 피를 뽑았다. 주황색 승복을 걸친 승려들이 피가 담긴 주사기를 들고 취재진에게 흔들어 보이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채혈 현장에서 만난 파비나 타라품 씨(46)는 “우리의 옷도 피도 모두 빨간색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투쟁방법”이라면서 “바닥에 뿌려진 피를 밟고 지나가야 하는 관료들은 두려움을 느낄 것”이라고 말했다.

▽“비위생적인 낭비다”
=거리를 시뻘겋게 물들인 이날 시위에 대해 적십자와 보건당국은 위생과 안전 문제를 제기했다. 주린 락사나위싯 보건장관은 “같은 주사기를 여러 번 사용해 채혈하는 경우 간염이나 에이즈 등의 질병에 감염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적십자 측도 “비위생적일 뿐 아니라 소중한 피를 낭비하는 것”이라며 “그 피로 여러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레드셔츠 지도자이자 의사인 웽 토지라칸 씨는 “검증된 의료 전문가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며 “채혈 현장에서는 1회용 주사기가 사용됐다”고 반박했다.

시위대 중에는 혈액 투척에 반대한 사람들도 있었다. 채혈이 막 시작됐을 때 수백 m씩 길게 늘어섰던 줄은 시간이 지나면서 눈에 띄게 줄었다. 지도부는 당초 10만 명에게서 100만 cc를 채혈하겠다고 밝혔지만 실제로는 목표치에 훨씬 못 미쳐 보였다. AFP통신과 AP통신 등에 따르면 이날 모은 피의 양은 목표치의 절반인 50만 cc였다. 시위대에서 이탈한 카티야 사와스디폴 씨는 “이런 식으로는 어떤 승리도 이끌어낼 수 없다”며 “지도부는 지지자들의 아까운 피를 허투루 쓰지 말고 자기들 부모 피부터 뽑으라”고 꼬집었다. 방콕 시는 질병확산이 우려된다며 시위 직후 피가 뿌려진 현장을 청소 및 소독했다.

정부의 완강한 태도와 혈액 투척 시위에 대한 거부감으로 일부가 시위 참여를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시위대 규모는 줄어드는 추세다. 전날 10만 명 가까이 운집했던 시위대는 현재 9만 명으로 감소했다.

한편 이날 팟파오 지역 내 아카라토른 라라트 태국 행정대법원장의 저택에서 약 500m 떨어진 민가에 M-79 유탄이 떨어져 경찰이 수사 중이다. 수사 당국은 이번 시위 시작 전 한 공장에서 수백 정의 사제 M-79 유탄발사기가 몰수된 정황에 비춰 이미 상당수 사제 불법 총기류가 시위대에 흘러들어갔을 것으로 보고 있다.

반정부 시위로 16일로 예정된 국회는 국회의원 과반수가 불참해 무산됐다.

방콕=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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