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변화 생겨 그라민 은행 들어갈 수 있길”

  • 입력 2009년 6월 21일 19시 44분


노벨평화상 수상 유누스 그라민 은행 총재 인터뷰

무하마드 유누스 그라민 은행 총재(69)는 가끔 자신의 은행에서 무담보소액대출(microcredit)을 받아 자립에 성공한 가정을 찾곤 한다. 그라민 가족에 합류한 지 15년이 지난 한 가정에선 집을 보여준 뒤 의사로 성장한 딸을 소개받기도 했다. 대출받은 여성은 문맹이지만 딸은 의사로서 인생 역전을 일궈냈다. 방글라데시에서의 작은 기적과도 같은 이런 성공사례들은 조금씩 전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다. 아프리카는 물론이고 뉴욕의 빈민층도 그라민 은행에서 대출받으며 새로운 인생을 꿈꾸기 시작했다. 19일 이화여대에서 열린 학술회의 참석차 방한한 유누스 총재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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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세상을 희망하고 있나.

"세상의 빈곤이 사라져 더 이상 가난하게 사는 이가 없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나의 꿈이다. 가난을 박물관에 보내 과거의 것으로 만들고 싶다. 내가 탐욕으로 가득한 경제구조가 아니라 '사회적 기업'(social business)을 통해 성취했던 것과 같이 이타적인 경제행위를 통해 사회적,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

사회적 기업은 유누스 총재가 사회사업을 위해 다국적기업과 합작으로 세운 기업을 말한다. 다농그룹과 합작해 만든 한 요구르트 회사는 아이들이 영양실조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요구르트를 생산한다. 이윤 창출이 목적이 아니어서 수익 대부분을 운영비로 재투자한다.

--다국적 기업이 단지 이미지 개선을 위한 차원에서 접근한 게 아닐까.

"그럴 수도 있다. 어떤 이들은 다농이 나를 이용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내가 그들을 이용한다고 말한다. 내가 바라는 방향으로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혜택을 베풀었는가로 평가받는 회사를 만든 것은 결과적으론 내 목적에 맞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구르트 생산 기술이 없는 우리는 그들의 기술과 투자가 필요하다."

--노벨상 수상이후 바뀐 점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

"아주 큰 변화가 생겼다. 세상이 나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대에서 기조강연을 한 뒤 박수를 받았던 얘기도 사실 이미 몇 년 전부터 해오던 얘기였다. 과거엔 내가 소리를 질러도 내 목소리가 멀리 전달되지 않았지만 노벨상을 받은 뒤엔 속삭이기만 해도 사람들이 다 듣는다. 기자가 찾아와서 인터뷰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과거엔 미친 소리라고 하던 사람들도 이젠 현명한 얘기라고 평가한다. 더 많은 곳에 내 목소리가 전해지고, 그것이 빈민구제에 도움이 되고 있다"

그라민 은행의 화려한 성과보다도 더욱 눈에 띄는 대목은 따로 있었다. 그의 교육에 대한 철학이다. 유누스 총재는 그라민 은행에서 대출받는 이들로부터 한 가지 약속을 받아낸다. 대출자들이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 문맹에서 탈출하게 만들겠다는 약속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그라민 은행에서 대출받은 그라민 가족의 자녀 100%가 진학해서 성취한 것을 정말로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며 "수세대 답습된 문맹이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다는 게 가장 큰 목표였다"고 말했다.

-교육에 관심을 가진 배경은 무엇인가. 부모님의 교육관은 어떤 것이었나.

"고등학교 과정인 8학년을 다니다 그만두신 아버지는 조그만 사업을 했다. 집안이 어려웠지만 아버지께선 자녀들의 교육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한두 명이라도 집안일에 매달린다면 그건 미래를 위한 교육 기회를 뺏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녀들 모두가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게 도와주셨다."

--한국에선 아이들이 학원을 다니느라 지식에 도움이 되는 고전을 읽을 기회도 그렇게 많지 않아서 걱정인데 어떤 충고를 해줄 수 있나.

"내가 어릴 때와 지금의 세상의 환경은 엄청나게 많이 달라졌다. 당시엔 세상에 대해 알고 싶을 때 유일한 통로가 책이었다. 라디오도 있었지만 대부분 음악만 나오니 책을 읽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TV도 있고, 역사채널, 내셔널지오그래픽 채널도 있다. 문제는 흥미로움이라는 것을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느냐는 것이다. 요즘엔 뭔가 궁금한 것이 생겨도 아버지에게 달려가서 묻는 아이들을 찾기 힘들다. 요즘엔 인터넷으로 아버지도 모르는 것을 금방 알아낼 수 있다. 결국 어떤 문제의식을 갖고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자녀들의 성장을 도울 수 있는 어떤 틀을 만드느냐가 중요해진 세상이다."

--그렇다면 독서의 중요성은 어떤 것일까.

"오늘날의 인터넷은 과거의 독서보다도 더욱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책은 계속 읽어야 한다. 사람의 삶이 담겨있고, 사회, 문화, 각종 현상을 다루는 것이 책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지 않으면 단지 TV를 보더라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영화를 보더라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이윤을 만들기 위해 제작될 뿐이다. 따라서 오늘날에도 독서의 중요성은 크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아이들이 편하고 쉽게 책을 읽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북한에도 어려움을 겪는 주민들이 많다. 다만 최근 북한이 주민들의 생활을 개선하기 보다는 핵개발로 방향을 돌리고 있어서 안타까운 생각이 드는데….

"도대체 말이 안 되는 것이다. 지도자가 현명하다면 자유, 경제개방을 어느 정도로 해야 할지 알 텐데….주민들을 계속 압박하고 체제를 조인다면 언젠가는 붕괴한다. 옛 소련이 그랬다. 같은 곳에서 출발한 한국은 다른 길을 걸어 경제성장을 했는데 북한은 그렇지 못하다. 사람들이 스스로 불행하다고 여길 때 변화를 이끌게 된다. 아무리 국민을 조종하고 세뇌시켜도 언젠가 모두 들고 일어나는 상황이 올 수 있다."

--북한에서도 그라민 은행과 같은 방식의 접근법이 통할까.

"그라민 은행은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북한에 변화가 생겨 다른 은행들이 들어가서 기능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그라민 은행도 소외받는 사람을 위해 할 일이 있을 것이다."

--최근 한국에선 전직 대통령 사망이후 민주주의 후퇴 논란을 얘기하는 사람들도 나오고 있다. 이런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이 있을까.

"한국은 더 이상 1970년대의 한국이 아니다. 이젠 아주 다른 한국이다. 부유해지고 국제사회에서의 파워도 커졌다. 다만 '법과 질서'만으로 충분치 않은 게 사회인만큼 뭔가 공통의 가치를 만들어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특히 젊은이들이 목적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들이 공허함을 느끼면 좌절하게 되므로 이들이 할 일을 만들어야 한다. 다양한 방식의 사회적 기업을 만들 수 있는 아이디어를 찾는 환경을 만드는 것도 이들이 뭔가 할 일을 만드는 길이기도 하다."

--민주주의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나.

"민주주의는 국민의 희망과 의지를 표현하기 위한 목적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권력승계가 아니라 국민들이 자신을 대변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지도자로 뽑는 것이 민주주의다. 선출자들이 그들을 대신해 국정을 운영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기본이다. 이를 위해선 투명성을 유지하고, 좋은 정부시스템을 만들어야 하며 자유언론을 보장해야 한다. 지도자도 일단 선출된 뒤에는 보스나 소유자가 아니라 일시적으로 국민을 위해 일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라민 은행 대출자의 97%가 여성인 이유는 무엇인가.

"처음엔 남성과 여성 비율이 50대 50 이었다. 그러나 은행을 운영하다보니 여성들에게 간 대출금이 더욱 효과적이고 영향력이 크다는 것을 알게 됐다. 여성들이 투자도 훨씬 현명하게 하곤 했다. 그래서 여성들에게 대출을 늘려나가기 시작했다."

--여성들이 더 효과적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여성들이 돈을 벌면 여유자금 활용의 우선순위는 항상 아이들에게 간다. 그리곤 가정, 그다음엔 미래를 위해 돈을 사용한다. 그러나 남성들은 다르다. 남성들은 자신들에게 초점을 맞춘다. 미래보다는 현재를 더 중시하는 것도 그 이유다. 그래서 우리 은행은 가족을 변화시키기 위해선 남성보다는 여성에게 대출하는 것이 더 효과적임을 알게 됐다."

유누스 총재는 예를 들어 미국의 금융위기를 촉발한 거대투자은행의 명칭이 '리먼브러더스'가 아니라 '리먼시스터스'였다면 큰 위기를 겪지 않았을 것이라고 비유적으로 얘기하기도 했다.

-당신의 월급은 얼마인가. 많은 사람들이 은행의 성공으로 돈을 많이 벌었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나는 은행 주식도 없고 모아놓은 재산도 없다. 그저 월급으로 한달에 5달러를 받을 뿐이다. 직원들도 마찬가지다. 다른 은행 직원들보다는 작은 액수지만 평균적인 빈민층의 수입보다는 많은 셈이다."

--직원들이 박봉을 받으면 부패의 유혹에 빠질 수도 있을텐데.

"당근과 채찍 정책으로 대응한다. 10년간 근무하면 그에 해당하는 액수를 연금으로 받는 시스템을 유지한다. 대신 부패한 것으로 드러나면 연금도 없이 회사에서 쫓겨난다. 좋은 연금제도가 회사를 유지하는 힘이 되고 있다."

:무하마드 유누스: 1940년 방글라데시 항구도시 치타공에서 태어났다. 다카대에 다니다 풀브라이트장학생으로 선발돼 미국 밴더빌트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치타공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하던 중 고리대금업자에게 시달리는 이웃 주민을 돕기 위해 1976년 마이크로크레디트 운동을 시작했다. 그라민은행은 현재 전 세계 2400여 개 지점에서 빈곤층을 대상으로 무담보소액대출 사업을 벌이고 있다.

김영식기자 spe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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