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하태원]美대선 TV토론 감상법

  • 입력 2008년 10월 2일 02시 59분


세계인의 관심을 모았던 미국 대통령선거 1차 TV토론이 지난달 26일 치러졌지만 누가 승자인지에 대한 논쟁은 현재 진행형이다. 사실 진짜 전쟁은 TV토론이 끝난 뒤 시작된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양당 캠프는 TV토론이 끝나자마자 가능한 한 많은 국민에게 자당 후보가 승리했다는 인식을 심기 위한 총력전에 돌입한다. 딱 떨어지는 성적표가 있는 게 아니어서 명백한 승자나 패자가 가려지기 힘들고, 보는 사람의 주관에 따라 평가도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언론기관이나 전문가들의 평가가 매우 중요하다. 특히 올해처럼 초박빙으로 치러지는 선거라면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일반인의 평가는 직접 TV를 통해 본 후보들의 ‘퍼포먼스’보다는 평론가의 논평이나 언론의 해설기사에 더 큰 영향을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버락 오바마 후보 캠프는 TV토론 직후 언론을 상대로 모든 조직력을 총동원해 존 매케인 후보가 90분의 토론 내내 단 한 차례도 ‘중산층’이나 ‘근로자’라는 단어를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을 집중 부각하려고 애썼다.

반면 ‘애국심’에 호소하는 매케인 후보 캠프는 오바마 후보가 이라크전쟁을 얘기하면서 단 한 차례도 ‘승리’란 단어를 언급하지 않았다고 맞불을 놓았다.

정책에 대한 이해도나 행정 경험 같은 대선 후보로서의 자질보다는 결정적인 실수를 찾아내는 것 역시 미국식 대선 토론의 승패 감별 요소 중 하나다.

2000년 TV토론 때 민주당 앨 고어 후보는 조지 W 부시 공화당 후보를 상대로 토론하던 중 긴 한숨을 내쉬거나 눈동자를 굴리는 장면이 TV에 몇 차례 잡히면서 거만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각인됐다.

1992년 대선에서는 재선에 도전한 조지 부시 당시 대통령이 40대 신예 빌 클린턴 민주당 후보와 토론하면서 지루한 듯 손목시계를 보는 장면이 문제가 됐다.

하지만 올해의 경우 그런 장면은 연출되지 않았다. 많은 미국 언론이 “제법 유효타가 교환됐지만 KO 펀치는 없었다”고 밋밋한 평가를 내놓은 것도 이런 결정적 감점 요인이 없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런 가운데 매케인 후보는 “많은 언론이 이번 토론을 무승부라고 평가한 데 대해 실망스럽게 생각한다”며 “(오바마 후보에게 더 우호적이었던) 언론들이 무승부라고 평가한 것은 결국 내가 이겼다는 뜻 아니겠느냐”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매케인 후보의 이 발언 속에는 주류 언론에 대한 깊은 불신이 묻어 있다.

실제로 이번 대선전에서는 인터넷 언론을 자칭하는 웹사이트들의 과장과 말 비틀기식 보도가 일부 주류 언론을 통해 확대 재생산되는 경우가 빈발하고 있다.

매케인 후보 진영은 “리버럴이 지배하는 일부 언론의 보수세력에 대한 공격”으로 규정했고, 9월 공화당 전당대회 당시 관중석에서는 ABC NBC 등 일부 방송사를 구체적으로 거명하며 공정보도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

이런 사정 때문인지 두 후보는 토론에서 몇 차례 진실 공방을 벌여야 했다. “오바마는 파키스탄 공격을 주장했다”거나 “매케인이 정유회사에 40억 달러의 혜택을 주는 법안에 서명했다”는 주장에 두 후보는 “그런 말 한 적이 없다” “기록을 똑바로 보라”고 반박했다.

2일 부통령 후보 간 토론을 포함해 11월 4일 대선까지 TV토론이 3차례 남아 있다. 치열한 경쟁 뒤엔 결과에 흔쾌히 승복하는 모습을 보여 온 미국의 선거문화를 다시 한 번 지켜보는 기회가 되길 기대해본다.

하태원 워싱턴 특파원 triplet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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