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소의 저주?… 월가 거물들 “안 풀리네”

  • 입력 2008년 6월 10일 03시 00분


기소했던 당시 검찰총장 주지사된 후 매춘스캔들로 퇴진

연봉승인 베어스턴스 회장 회사 헐값 매각후 자리 쫓겨나

그래소 승소 분위기 속 폴슨 前이사는 재무장관으로 ‘부활’

굴욕과 망신이 쉽게 잊혀지고 ‘새로운 악인’이 과거의 악인 자리를 속속 대체하는 곳, 잘나가던 승자들의 위상이 순식간에 추락하는가 하면 패자부활전도 가장 활발히 이뤄지는 공간….

뉴욕타임스가 전하는 세계 금융의 중심지 뉴욕 월가의 모습이다.

5년 전 불거진 리처드 그래소 전 뉴욕증권거래소(NYSE) 회장의 연봉을 둘러싼 법정 공방과 그 뒤 월스트리트 최고경영자(CEO)들의 신상 변화는 이런 특징을 잘 보여 준다. 지금도 월가에는 이른바 ‘그래소의 저주’라고 불리는 업계 거물들의 인생유전이 계속되고 있다.

○ 그래소는 결국 부활하는가

뉴욕연방항소법원이 최근 심리 중인 그래소 전 회장 사건은 그에게 유리한 쪽으로 결론이 날 가능성이 크다고 지난주 로이터통신 등 외신들이 보도했다.

이 사건은 그래소 전 회장이 2003년 무려 1억8700만 달러(약 1910억 원)의 연봉을 받은 데 대해 논란이 불거지면서 시작됐다. 거센 비난 속에 그는 결국 회장 직에서 물러났고, 엘리엇 스피처 당시 뉴욕 주 검찰총장은 그를 기소했다.

비영리기관이었던 NYSE에서 받는 연봉으로는 액수가 터무니없이 많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를 받아 챙겼고, NYSE 이사진의 승인 과정에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이유였다. 그래소 전 회장은 이를 포함해 6건의 민형사 소송에 휘말렸다.

그러나 뉴욕연방항소법원 재판관들은 3일 열린 재판에서 그래소 전 회장 측에 동조하는 모습을 나타냈다. 불법행위를 인정할 증거가 충분치 않고 검찰이나 주 정부가 연봉을 토해 내라고 요구할 권리도 없다는 것. 이미 그래소 전 회장은 하급심에서 일부 승소 판결을 받았다.

최종 판결이 하급심 취지대로 나올 경우 그는 거액의 연봉을 고스란히 유지할 수 있다. 불명예 퇴진 뒤에도 그는 자신이 설립한 자선단체 아메리칸드림재단의 대표로 활동하며 일주일에 두 번 정도 고급 이탈리아식당에서 식사를 즐기는 등 여유롭게 살고 있다.

○ 굴욕적 추락, 그래소의 저주인가

반면 스피처 당시 검찰총장은 법에 규정된 권한을 넘어 무리하게 그래소 전 회장을 기소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게 됐다.

더욱이 그는 올해 3월 드러난 매춘 스캔들로 뉴욕 주지사 자리에서 불명예 퇴진한 상태다. 한때 ‘월가의 저승사자’로 불릴 만큼 금융회사 및 소속 임원들의 부정부패 척결에 앞장서 온 그의 명성은 바닥에 떨어졌다.

5년 전 그래소 전 회장의 연봉을 승인해 준 NYSE 이사회 멤버들의 운명도 그새 많이 바뀌었다.

제임스 케인 당시 베어스턴스 회장은 월스트리트의 금융위기 속에 회사가 JP모건에 헐값으로 매각되면서 9억 달러를 날리고 회장 직도 잃었다. 스탠 오닐 당시 메릴린치 회장도 사상 최악의 실적인 300억 달러의 손실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모건스탠리의 CEO였던 필립 퍼셀 씨는 2005년 내부 권력투쟁 과정에서 내몰렸다. AIG그룹의 모리스 그린버그 전 CEO도 사실상 쫓겨나 이제는 미국 금융당국의 수사를 받을 처지에 놓였다.

위르겐 슈렘프 전 다임러크라이슬러 회장은 2005년 회사가 수십억 달러의 손실을 지자 갑자기 사임했다. 의류업체 와나코의 린다 와크너 전 CEO도 2001년 회사가 파산 위기에 몰리자 해고됐다. ‘살림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사업가 마사 스튜어트 씨는 2004년 말 주식 내부거래 혐의로 5개월간 감옥 신세까지 졌다.

NYSE 멤버였던 존 제이콥슨 씨는 “(그래소의) 저주라는 것을 믿지는 않지만 최근의 현상은 참 흥미롭다”며 “그래소 전 회장을 중심으로 이들이 맺은 관계를 도표로 그릴 수 있을 정도”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래소 전 회장이 임명한 당시 NYSE 이사회 멤버 중에는 승승장구한 사례도 있다.

헨리 폴슨 전 골드만삭스 회장은 미국 재무장관으로 자리를 옮겼고, 자산운용사 블랙록의 로렌스 핑크 회장은 블랙록을 이 업종 내 세계 최대 규모로 키워냈다. 2004년 크레디스위스은행에서 해고당했던 존 맥 씨는 모건스탠리의 CEO로 임명되면서 부활했다.

뉴욕타임스는 “5년이라는 기간은 월가에서는 긴 시간”이라며 “그 사이 신용거품의 붕괴와 각종 기업 스캔들로 많은 CEO가 자리에서 쫓겨났고 문제 인물 리스트도 빠르게 바뀌었다”고 분석했다.

이정은 기자 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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