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살아있다]제3장 러일전쟁과 조선의 식민지화(下)

  • 입력 2007년 9월 14일 14시 3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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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윗 사진)경의선의 한국 측 최북단 역인 도라산. 5년 전에 만들어져 아직 새롭다=한국 파주시에서 (사진 나카노)(아래 사진)철도를 파괴한 조선인을 일본군이 처형하는 장면을 재현한 전시다. 한국 어린이가 가만히 보고 있다=한국 천안시 독립기념관에서(사진 나카노)
▲ (윗 사진)경의선의 한국 측 최북단 역인 도라산. 5년 전에 만들어져 아직 새롭다=한국 파주시에서 (사진 나카노)

(아래 사진)철도를 파괴한 조선인을 일본군이 처형하는 장면을 재현한 전시다. 한국 어린이가 가만히 보고 있다=한국 천안시 독립기념관에서(사진 나카노)
철도와 함께 일본군이 몰려 왔다

넓은 홈에 내려서면, “서울까지 56km, 평양까지 205km”라는 안내 표시가 눈에 들어온다.

여기는 휴전선에서 가까운 도라산 역이다. 중국 국경에 가까운 북한의 신의주와 한국의 수도 서울을 연결하는 경의선으로, 한국 측의 최북단 역이다. 한국군이 민간인 출입을 제한하는 지역에 역이 있어서, 여기까지 오는 열차는 하루에 3번뿐이다. 신분증명서를 보이고 헌병에게 소지품 검사를 받지 않으면 승객이 될 수 없다.

이 주변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지뢰밭이었다. 그러던 것이 2000년에 열린 첫 남북 정상회담 이후, 한국 전쟁으로 인해 파괴된 경의선의 일부를 복원하기로 해, 이 역도 5년 전에 새롭게 태어났다. 금년 5월에는 휴전선을 넘어 시험 운행이 있었다. 56년 만에 열차가 남북을 왕래했다. 북으로 이어지는 철로는, 민족 화해의 장을 여는 새로운 무대이다.

홍수로 인해, 남북 정상회담이 10 월 초로 연기되었지만, 한국의 노무현 대통령은 8월 28일, 이 경의선 철도와 나란히 이어지는 도로를 타고 평양에 갈 예정이었다. 남북한 교류의 성과를 보여주고 싶어 하는 인상이 느껴진다.

그런데, 나는 왜 여기에 왔는가.

일본이 언제, 어떻게 한반도를 식민지로 지배하게 되었는가를 조사하는 동안, 철도가 깊숙이 관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경의선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식민지 지배의 그늘과 남북 분단, 그리고 융화. 지배의 시작을 찾는 여행의 스타트 지점으로서, 역사가 겹겹이 쌓여 있는 상징적 장소를 봐 두고 싶었다.

지배를 확대하는 도구 / 분쟁의 불씨로

서울에서 『일제 침략과 한국 철도』라는 저서를 쓴 정재정(鄭在貞) 서울시립대 교수를 만났다. “철도가 생겨서 편리하게 되지 않았냐?”는 질문을 던지자, 정 교수는 굳은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한국의 입장에서 보면, 철도와 함께 일본군이 쳐들어왔고, 수탈과 억압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일본은 한반도를 군사상의 생명선이라 생각해, 한반도를 지배하기 위한 도구로서 철도를 깔았다. 또한, 러일 전쟁은 철도를 둘러싼 전쟁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정 교수의 설명은 계속 된다.

열강들에게 있어서, 군과 물자를 대량으로 운반하는 철도는, 지배 지역을 넓히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중국 동북부와 한반도 북부의 철도를 둘러싸고 싸운 것이 일본과 러시아였다. 교섭으로는 결론이 나질 않았고, 전쟁을 부른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실제로 청일 전쟁 후, 러시아는 중국 동북부를 횡단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 인접하는 동청철도와 하얼빈으로부터 뤼순(旅順)까지를 연결하는 남만주(南満州) 지선의 부설권을 청나라로부터 손에 넣는 등, 스스로 철도망을 넓히려고 안간힘을 썼다.

일본도, 서울과 반도 남단 부산을 연결하는 경부선과 경의선을 손아귀에 넣으려고 안간힘을 쏟았다. 두 노선으로 한반도 종단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경부선은 청일 전쟁 후에 부설권을 따내서 1901년에 기공했다. 러시아와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공사를 빠른 속도로 진행시켰다. 경의선은 대한제국 정부가 조선 민족의 자력으로 건설하려 하고 있었지만, 자금 부족으로 좀처럼 진행되지 않고 있었다.

당시의 공문서에서 일본 정부의 의도를 분명히 읽어낼 수 있다. 예를 들어, 1902년, 고무라 주타로(小村寿太郎) 외상이 가쓰라 다로(桂太郎) 수상에게 제출한, 내각회의에서 결정된 문서에는 이러한 취지가 쓰여 있다.

“경의철도를 우리 손으로 부설해, 경부선과 연락시키면 한국을 관통하는 간선철도는 모두 제국의 것이 되며, 이는 한국을 우리의 세력 범위에 두는 것과 같다.”

이듬해, 러시아와의 교섭 방침을 둘러싼 내각회의에서는 “향후 한국 철도의 만주 남부로의 확장”에 대해, 러시아가 방해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기로 결정하였다. 이른바, 한반도에서 더 나아가, 중국 동북부로 선로를 늘려 세력권을 확대시키자는 것이었다.

1904년 2월, 러일 전쟁이 시작된다.

개전 전, 대한제국은 전쟁에 휩싸이지 않으려고 “중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무시하고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기 2일 전에 인천에 선발대를 상륙시켰고, 후발 부대를 포함해 전체 1만여 명의 병력이 수도와 그 주변에 몰려들었다. 점령이라고도 할 수 있는 상황으로, 전쟁이 시작된 약 2주 후에는 “한일의정서”를 체결, 일본이 “군사 전략상 필요한 지점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인정하게 하였다. 단적으로 말하면, 일본군이 “이 토지는 필요하다.”라고 간주하면, 일본군의 것이 될 수 있게 된 것이다.

현안이었던 경의선에 대해서, 일본은 대한제국에게 “군용 철도”로서 만드는 것으로 통고하고, 철도 대대가 공사에 착수했다.

식민지 지배의 시작 / 러일 전쟁으로부터

철도와 식민지 지배의 역사가 겹치는 장소를 방문하고, 서울시내의 용산구로 향했다.

용산구에서 용산 역 동쪽 부근은 한국 지도에서 공백으로 처리되어 있다. 거대한 주한미군 기지가 있기 때문이다. 도로 가에는 철조망과 콘크리트, 벽돌로 쌓은 벽이 계속 된다.

이 일대는 러일 전쟁이 한창일 때, 일본군이 토지를 수용해 군사시설을 만든 곳이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민중이 자유롭게 드나들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일본군은 왜, 용산을 선택했을까?

서울대에서, 김백영(金白永) 연구원이 낡은 지도를 보여 주며 가르쳐 주었다. 지역의 관문 역할을 하는 용산 역은 당시, 한반도 철도의 매듭 역할을 담당하여, 경의선 등도 여기에서부터 이어졌다. 왕궁에도 위압을 보일 수 있는 위치였다. “왕을 위압해서, 철도로 한반도 각지로 이동하기 쉬운 곳에 일본군은 거대한 군사 거점을 쌓아 올렸습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노선인 경부선은 1905년 1월에 완성되었고, 같은 해, 일본의 시모노세키를 오가는 연락선 운항도 시작되었다. 다음 해 4월에는 경의선도 전선이 개통되었다.

러일 전쟁을 포함한 불과 몇 년 안 되는 동안, 한반도를 남북으로 관통해 중국 동북부를 잇는 약 950km의 간선철도를 만들어 냈다. 일본의 신간선으로 치면, 도쿄 역(東京駅)에서 신야마구치 역(新山口駅) 부근에까지 해당하는 거리다. 육로로는 말 등을 이용해 무기와 식량을 옮겼던 것을, 대륙 입구까지 대량 수송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군과 물자를 옮기는 동맥을 만들어 낸 것만이 아니다. 일본군은, 전선으로의 물자 수송과 철도 연선의 경비 등을 구실로 주둔군을 편성하여, 대한제국으로부터 수도의 경찰권도 빼앗았다.

러시아와의 전쟁이 끝나고도, 일본군대는 철수는 커녕, 2개 사단 규모의 약 3만 명의 육군 부대가 눌러 앉았다. 또한, 대구, 부산 등 연선을 중심으로 광대한 토지를 차례차례로 수용해, 군사 거점으로 삼았다.

서울 사무소에서 만난 “친일반민족 행위 진상 규명 위원회”의 서민교(徐民教) 전문위원은 “러일 전쟁이 시작됨과 동시에, 한국은 사실상, 일본군의 손아귀에 들어가 식민지화가 진행되었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런 이유로 위원회가 조사 대상으로 하고 있는 “일제 강점”(일본에 의한 식민지 지배) 기간도, 1904년 2월 러일 전쟁 개전에서부터 1945년 8월 해방까지로 정하고 있다.

즉, 한국에서는 식민지 지배의 시작을 1910년 한일합방 조약 체결부터가 아니라, 러일 전쟁에서부터라고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농민이 힘든 노동을 / 저항 운동의 대상으로

조선 민중의 눈에 철도 건설은 어떻게 비쳤을까?

일본의 역사 교과서 문제를 계기로, 20년 전에 만들어진 한국의 독립기념관(천안시)을 7 월 초에 찾아갔다. 광장에는 총을 겨냥한 일본병사와 기둥에 묶여 처형당하는 민중의 등신대 인형이 서 있었다. 설명 판을 보니, 8월 말까지 하는 기념 전시로서 “일제가 한국 침략을 위해서 깐 철도를 파괴하여, 1904년에 순국한 애국지사의 처형 모습을 재현했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러일 전쟁이 한창일 때, 수도 경의선 부근에서 공개 총살된 3명은 지금, 일본의 식민지화에 저항한‘의병’이라 기리어, 처형 장면의 기록 사진은 한국의 역사 교과서에도 등장한다.

철도는 민중으로부터 농지를 빼앗은 것만이 아니었다. 일본 군인과 업자는 주로 감독 역을 하고, 현장에서의 힘든 노동은 억지로 모으다시피 한 농민들의 몫이었다. 이러한 수법은 민중의 반발과 미움을 불러와, 일본 지배에 저항하는 ‘의병 투쟁’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애를 먹은 일본군은 철도를 부순 사람과 그들을 숨겨준 사람을 ‘사형’에 처하는 군령도 내렸고, 실제로 처형했다.

경부선이 통과하는 서울 교외의 안양시. 마을 풍경이 내려다보이는 작은 언덕에 서 있는 비석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라는 이름을 찾아냈다. 비문에 따르면, 1905년 11월, 이토(伊藤)가 경부선 열차로 안양을 통과한다는 것을 안, 마을 출신의 원태우가 열차에 돌을 던져 이토(伊藤)가 부상을 당했다고 한다. 비석은 고문을 받고 투옥되어 불우한 생애를 보낸 ‘지사’의 위업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현지 주민들이 15년 전에 세운 것이다.

전 수상 이토(伊藤)는 대한제국으로부터 외교권을 강탈하고 보호국으로 삼는 제2차 한일 협약(을미 조약) 조인을 강요하기 위해 특사로 와 있었다.

그 이토(伊藤)가 안중근에게 살해된 것은 10개월 후인 1910년 8월 22일이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려, 합병 조약 체결을 승인했다. 지금은 세계 유산이 된‘창덕궁’한 쪽에 회의 장소였던 곳이 있는데, 설명 판에는 “한일 합병을 결정한 비운의 장소”라고 쓰여 있었다.

이듬해, 한반도와 중국 대륙을 가로지르는 압록강의 가교 공사가 완성되었다. 부산에서 중국 동북부까지가 레일로 연결되었다. 일본은 대륙 침략으로 뻗어 나갔다.

(나카노 아키라 中野晃)

▼다케시마(한국명:독도) 문제 민족의 존엄성과 관련▼

일본해(한국에서는 동해라고 부르고 있으나, 일본에서 일본해로 표기하므로 일본어 표기로 함)에 떠있는 바위투성이의 고도이지만, 그 영유권을 둘러싸고 한일은 심하게 대립하고 있다. 거기에는 일본에 의한 식민지 지배라고 하는 역사 문제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일본 패전 후인 1946년, 연합국 군총사령부(GHQ)는 각서에서, 일본의 행정권을 정지하는 지역에 다케시마를 포함시켰다. 그러나 1951년에 서명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서는, 일본이 포기하는 섬에 독도는 명기되지 않았다.

이 때문이었는지, 1952년 조약 발효 전, 한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공해 상에 ‘이(李) 라인’ (한국에서는 ‘평화선’)을 설정하고, 독도를 한국 쪽으로 넣었다.

그 당시부터 한일 국교 정상화 교섭에서는 독도 문제가 최대 난관의 하나가 되었으며, 결국 영유권 문제는 보류한 채로 국교를 맺었다.

독도 문제를 일본은 영유권 분쟁이라고 단순히 인식하지만, 한국에서는 민족의 존엄성이 얽힌 역사 문제인 것이다.

그 계기가 된 것은 독도의 시마네현(島根県) 편입을 언명한 1905년의 내각회의 결정과 현(県) 공시였다. 때는 러일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었으며,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보호국으로 만들었던 해로, 5년 후의 병합으로 치달려 간다.

이 때문에 한국은 독도를 ‘강탈 피해 제1호’로 간주하고 있다. 2005년 시마네현(島根県) 의회가 ‘편입 100주년’을 기해 “독도의 날”조례를 가결한 것에 대해, 한국 측이 격렬하게 반발한 것은, 이로 인한 것이다.

(고스케 고이치 小菅幸一)

◆친일반민족 행위 진상 규명 위원회

과거사의 재검토를 진행하는 노무현 정부 아래,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협력한 자와 그 행위를 조사하기 위해 특별법에 의해 2005년 5월 발족했다. 위원은 학자나 변호사 등 11명이다. 조사 스태프도 있다. 임기는 4년이나 연장도 가능하다. 이 위원회와는 별도로, ‘일제에게 협력한 대가’로 손에 넣은 재산을 조사하여, 그 자손들로부터 몰수하여 나라의 것으로 하는 “친일반민족 행위자 재산 조사위원회”가 있다.

◆식민지

어떤 민족과 국민의 일부가 다른 토지로 이주하여, 새롭게 만든 도시와 마을을 의미하였으나, 15 세기‘신대륙’발견 이후, 본국 외에 그 지배하에 있는 지역도 가리키게 되었다. 19 세기 후반 이후, 구미 열강은 원료를 손에 넣으며 제품을 파는 시장으로 본국과 먼 아시아, 아프리카, 태평양 지역에서 식민지 획득 경쟁을 펼쳤다. 그러나 일본처럼, 고대부터 교류가 있는 이웃나라를 식민지 지배한 예는 보기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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