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최고명문 학생들 “좌파 정당이 세상 바꿀수 있을까”

  • 입력 2006년 7월 5일 03시 09분


코멘트
머릿속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가 지배하고 있고, 반미 감정은 마치 뼛속에까지 스며든 듯하고, 그러면서도 부조리한 사회의 높은 벽에 좌절감을 토로하는 청년 지식인들…. 1980년대 한국 대학의 학생회관에 들어서면 흔히 볼 수 있었다.

경제 규모만 보면 한국과 엇비슷한 지구 반대편 멕시코 최고 명문 대학의 2006년 7월 모습이 그랬다. ‘전교 1등’ 학생들만 입학한다는 멕시코국립자치대(UNAM). 1910년 독립 이후 역대 대통령 중 2명만 빼고 모두 이대학을 졸업했다는 최고 명문이다. 대통령 선거에서 우파 후보가 1%포인트 앞섰다는 비공식 결과가 나온 3일, 캠퍼스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온통 ‘좌향좌’

정치학과 라미레스 메디나 교수를 찾아갔다. “난 코뮤니스트(공산주의자)”라고 자기를 소개한 그는 “선거관리위원회가 뭐라 하더라도 좌파인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후보가 5%포인트 이긴 게 분명하다”고 말했다.

정치학과에는 무려 250명의 교수가 있다. 정부가 운영하는 대학이라 경영합리화나 ‘군살 빼기’와는 무관한 곳 같았다. 정치학과 조교인 디에고 페레스 씨는 “우파 후보를 찍은 교수는 10명 남짓에 불과할 것”이라고 했다.

여기는 명문대 가운데 유일하게 학비가 사실상 무료다. 상징적으로 한 학기에 20페소(약 2000원)를 낼 뿐이다. 멕시코 판 ‘빈자(貧者)의 하버드’라 불릴 만했다. 캠퍼스 한쪽 좌판에서는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을 팔고 있었고, 어떤 건물에는 쿠바 공산혁명을 이끈 체 게바라를 본떠 ‘체 하우스’란 별칭이 붙어 있었다. 학교에서 발견한 유일한 외국어는 도서관 입구에 스프레이로 쓰인 러시아어였다.

○“미국의 오염이 싫다”

‘영어와 비슷한 스페인어를 쓰고, 미국과 국경을 접한 멕시코의 최고 명문대 학생이니까 영어를 웬만큼은 하겠지’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캠퍼스를 제법 오랫동안 돌아다녔으나 영어 인터뷰가 가능한 학생은 단 한 명도 못 만났다.

페레스 씨는 “영어를 배운다면 미국의 사상 철학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배우고 싶지도 않고, 대학도 굳이 권하지 않는다”고 했다.

언론학과 4학년인 리카르도 코르네흐 씨는 “미국과 캐나다의 위치가 바뀌어서 멕시코와 미국이 국경을 맞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멘도사 씨는 “브라질 옆 정도가 이상적”이라고도 했다.

지도까지 바꾸고 싶다는 그들도 할리우드의 상업성엔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본 영화가 뭐냐’고 거듭 물었더니 멘도사 씨는 “엑스맨을 봤다”고 했다. 비교적 최근 상영된 공상오락 영화다.

○미래가 안 보인다

최고 학부의 학생들도 취업 걱정을 할까. 학생들은 대부분 “국내에서 공부를 계속하겠다”고 말했다. 유학 희망자도 스페인과 중국을 꼽았다.

학문을 계속하려는 주요 이유는 취업난 때문이었다. 놀랍게도 모든 학생이 “커넥션이 없어서 어렵다”는 말을 꺼냈다. 튼튼한 줄이 없다는 얘기였다. 멘도사 씨는 지난해 오브라도르 후보 캠프에서 자원봉사를 했지만 취업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는 좌파정당에서조차 “이왕이면 여러 방면의 커넥션이 있는 학생이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학생들은 말을 꺼내진 않았지만 혁명에 버금가는 ‘무엇’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오브라도르 후보의 급부상을 ‘메시아의 재림’으로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토록 열광하고 집착했던 것 같다.

세계에서 네 번째로 돈이 많은 부자가 있고 대미 수출만 1년에 2000억 달러를 넘게 하는 멕시코의 미래는 어둡게만 보였다.

srkim@donga.com

▼멕시코 대선 혼돈 속으로▼

멕시코 대선 정국이 ‘오리무중(五里霧中)’에 빠졌다.

연방선거관리위원회의 루이스 우갈데 위원장은 3일 “1, 2위 득표자의 표차가 1%포인트밖에 안 돼 일러야 6일경에 당선자를 발표할 수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멕시코 일간 엘 우니베르살은 이날 보수여당인 국민행동당(PAN)의 펠리페 칼데론 후보가 36.4%를 득표해 1위를 차지했다고 보도했다.

연방선관위가 ‘예비 선거 결과 프로그램(PREP)’을 통해 전국 13만 개 투표소 가운데 98%에서 표본을 추출해 예비 개표를 실시한 결과 칼데론 후보가 40만2708표 차로 좌파인 야당 민주혁명당(PRD)의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후보를 이겼다는 것.

칼데론 후보는 곧바로 TV에 출연해 “야당은 선거 패배를 인정하고 멕시코 통합과 국민 화합을 위한 노력을 시작할 때”라고 주장했다. 승리를 먼저 선언한 것이다.

이를 두고 미국의 뉴욕타임스는 “칼데론 후보가 오브라도르 후보를 자극해 선거 결과에 불복하도록 만들고, 거리로 뛰쳐나오도록 하기 위한 전략”이라고 분석했다.

오브라도르 후보도 예비 개표 결과에 불복한다는 방침을 분명히 했다. 그는 “선관위의 예비 선거 결과 프로그램에 문제가 있다”면서 “법적 소송을 비롯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잘못된 결과를 바로잡겠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300만 표가 실종됐다. 선거에 깨끗이 졌다면 인정하겠지만 단 한 표라도 이겼다면 그 승리를 지키기 위한 모든 노력을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지자들을 동원한 항의시위나 시민 불복종 운동도 배제하지 않겠다는 얘기다.

이호갑 기자 gdt@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