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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5년 12월 30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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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도쿄부립 제1중학교(현 히비야고)에 다니던 최린(崔麟), 최남선(崔南善) 등 한말 첫 황실특파유학생 44명이 을사늑약에 항의해 동맹휴학을 했다가 전원 퇴학당한 사실이 70여 년 만에 밝혀졌다’는 내용이었다.
1878년 세워진 히비야고는 일본 최고의 명문 공립고등학교. 그 자신이 이 학교 출신으로 모교에서 사회과목과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다케이 씨는 기사 내용을 단서로 해 학우회보와 동창회 명부를 뒤지고 관련 사료들을 쫓기 시작했다. 1년 반에 걸친 노력의 결과물은 최근 ‘황실특파유학생-대한제국으로부터의 50명(햐쿠테이샤·白帝社 간)’이란 저서로 나왔다.
그중에서도 히비야고의 ‘학우회잡지’, 일본 외무성의 외교문서, 훗날 중국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이 된 조용은(趙鏞殷·독립운동가 조소앙의 본명)의 일기인 ‘동유약초(東遊略抄)’는 서로의 내용을 보완하며 100년 전 유학생들의 행적을 복원해 주었다.
1904년 조선정부가 선발해 보낸 국비유학생 50명은 16∼25세의 청년들로 이 중 44명이 히비야고에 입학했다. 이들에 대한 퇴학조치는 외교문제로 비화됐고, 이듬해 25명이 복학했다. 그러나 최린은 동맹휴학 중심인물로 지목돼 퇴학 처리됐다. 최남선은 자퇴했고 조용은만이 제대로 졸업했다.
책에는 이 과정에서 유학생들의 울분과 학교 측과의 갈등 등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다케이 씨는 1991년 처음 방한한 이래 ‘닮은 듯 다른’ 점에 끌려 ‘한국 마니아’가 됐다. 매년 4, 5회씩 드나들며 ‘서울의 왕궁 순례’ 등 한국을 알리는 일본어 책을 5권이나 냈다. 이번 책을 쓴 이유도 한국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서라고.
“가령 당시 유학생들의 심리상태의 변화상 등을 보면 한일 간 문제의 뿌리를 알 듯한 생각이 듭니다. 서로 좋아하건 싫어하건, 우선은 한국인과 일본인이 서로에 대해 좀 더 알아야 한다고 봅니다. 서로 잘 안다고 자신하기 때문에 더 무지할 수도 있거든요.”
서영아 기자 s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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