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화약세…도요타 “표정관리 힘드네”

  • 입력 2005년 12월 6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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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월 17일 달러당 101.67엔, 12월 5일 달러당 121.36엔. 일본 도요타자동차 경영진은 요즘 도쿄(東京) 외환시장의 엔화 시세가 전해질 때마다 표정 관리에 각별히 신경을 쓴다. 엔화 가치가 하락한 덕택에 엄청난 돈을 챙기고 있지만 고전 중인 GM 등 미국 경쟁업체들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 이 회사가 올해 초 경영 계획을 세우면서 예상한 달러당 엔화 환율은 110엔 선.》

도요타는 수출 비중이 높아 엔화 가치가 1엔 하락하면 연간 순이익은 250억 엔 늘어난다. 북미 자동차 시장을 석권해 최대 이익 기록 경신이 확실한 상황에서 엔화 약세로 약 2500억 엔의 추가 이익이 굴러 들어오는 셈이다.

일본 재계에서는 “한번 운이 트인 기업은 무엇을 하든 잘된다는 속설을 입증한 사례”라며 도요타를 부러워한다.

▽일본 기업, ‘20년 만의 돈벌이 기회’=도요타와 함께 일본에서 잘나가는 기업으로 꼽히는 캐논도 콧노래를 부르기는 마찬가지. 경영 상태가 좋은 기업만 엔저(低)의 혜택을 보는 것은 아니다. 내년 3월 결산에서 100억 엔의 적자를 예상했던 소니도 60억 엔의 흑자가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통상 자국의 통화 가치가 하락하면 수출 업종은 유리한 반면 수입 업체는 수지를 맞추기 힘들다. 하지만 이번엔 거의 모든 업종이 엔저를 환영한다. 원자재 수입을 많이 하는 철강업계 측은 “자동차 회사들의 장사가 잘되면 강판 수요가 늘어날 테니 엔저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고 밝혔다.

물가 수준 등을 감안한 엔화의 실질 환율은 1985년 10월 플라자합의 이후 20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 일본 기업으로선 미국과의 무역 마찰이 심각했던 1980년대 후반 이후 가장 유리한 환경을 맞은 것이다. 닛케이평균주가가 연일 상승세를 타는 것도 엔저 영향에 대한 기대에서다.

▽미국, 유럽 ‘엔저 일단 용인하지만…’=“현재의 엔화 시세는 선진7개국(G7)이 정식으로 논의할 정도는 아니라는 의견이 많았다.”

2∼4일 영국 런던에서 열린 G7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회의에서 엔화 약세가 주요 의제로 취급되지 않자 5일 도쿄 외환시장에서는 엔화가 2년 10개월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G7 내부에 세계 경제가 살아나려면 일본 경제의 회복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퍼져 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그러나 미국과 유럽의 인내에도 한계가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 내년 의회 중간선거를 앞두고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미국 산업계의 불만을 추슬러야 한다는 예상도 적지 않다.

▽‘양날의 칼’ 엔저, 언제까지 갈까=엔저를 유발한 직접적인 이유는 일본 통화당국이 경기를 살리기 위해 엔화를 많이 찍어 냈기 때문. 니혼게이자이 신문은 “미일 간 금리차 확대로 보유 엔화를 달러로 바꾸려는 수요가 늘면서 엔화 하락을 부추겼다”고 전했다. 한 연구기관은 엔화 가치가 10% 하락하면 일본 국내총생산(GDP)을 0.2% 늘리는 효과가 나타난다고 예상했다.

엔화는 달러화뿐 아니라 유로화, 파운드화, 한국 원화에 대해서도 7년 만에 최저치로 하락했다. 올해 초 100엔당 1009원이던 원-엔 환율이 최근 860원대로 밀리면서 일본에 수출을 많이 하는 한국 기업들이 수지를 맞추느라 비상이 걸렸다.

엔화 약세가 내년 상반기에도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시각이 압도적이다. 일본 언론들은 “과도한 엔저는 다른 선진국들의 반격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일본에도 ‘양날의 칼’”이라며 엔화 가치의 흐름이 내년 초 세계 경제의 주요 변수가 될 것이라고 전했다.

도쿄=박원재 특파원 parkwj@donga.com

▼부시정부 “위안화 절상이 더 시급”▼

“우리는 도요타와는 경쟁할 수 있지만 일본과는 경쟁할 수 없다.”

포드자동차의 윌리엄 포드 회장이 최근 엔화 약세를 언급하면서 한 발언이다. 도요타자동차 자체는 문제가 아니지만 엔화 약세에 따라 일본 자동차가 누리는 가격 경쟁력과는 경쟁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엔화 약세로 일본 회사들이 미국에서 대당 몇천 달러씩 싼값에 자동차를 팔고 있다는 게 미국 회사들의 시각.

미국 회사들은 심지어 “일본 정부가 인위적으로 엔화 가치 약세를 조장하고 있다”며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일본 정부에 압력을 넣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아직까지 ‘일본 정부가 외환시장에 불공정 개입하고 있다’는 자동차 업계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엔화 가치가 급락하면서 이달 초 “존 스노 미국 재무장관이 선진7개국(G7) 재무장관 회담에서 엔화 약세 문제를 논의할 것이라고 말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러나 미국 재무부는 즉각 “스노 장관이 엔화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언급한 적이 없었으며 엔화의 상대적 가치에 대해서도 코멘트하지 않을 것”이라는 해명자료를 냈다.

현재 미국 정부는 엔화보다는 위안화에 초점을 두고 있다. 중국과의 무역적자가 발등에 떨어진 불이기 때문이다.

뉴욕=공종식 특파원 kong@donga.com

▼中 관망세 “日 제품값 떨어져 좋아”▼

중국은 일본 엔화 약세에 대해 관망하는 분위기다. 환율에 대한 관심이 미국 달러화에 집중돼 있기도 하지만 엔화 약세가 중국 경제에 불리하지 않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김범수(金範洙) 우리은행 베이징(北京)지점장은 “엔화 약세는 중국의 대일 무역구조에 오히려 도움이 되는 만큼 중국이 이 문제를 이슈화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엔화 약세는 중국 경제 성장에 필요한 일본의 설비재나 하이테크 제품의 수입 단가를 떨어뜨리고 대일 무역 불균형을 개선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

반면 수출 상품은 대부분 다른 경쟁국과 겹치지 않는 농산품이나 생활필수품 위주의 저가 공산품이어서 단기적으로 영향이 없다는 설명이다. 다만 엔화 약세가 위안화 강세로 이어지면서 중장기적으로 베트남이나 태국 등 동남아시아의 저가 상품과 일본 시장에서 경쟁하게 될 가능성에 대해서는 우려하고 있다.

중국은 또 엔화 가치의 지속적인 하락이 미국과 일본 간 환율 마찰로 이어질 경우 위안화 평가 절상 문제에 대한 미국의 관심과 압력을 분산시키는 효과도 거둘 수 있을 것으로 본다.

한 전문가는 “현재 미일 양국이 밀월 관계인 데다 미국 입장에서는 위안화 문제가 더 큰 만큼 엔화 약세가 미일 간 환율 갈등으로까지 비화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베이징=황유성 특파원 ys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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