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씨는 1980년 8월 태국의 난민 수용소에서 쌍둥이 동생 꼬아 씨와 함께 태어났다. 그 몇 개월 전 어머니 응우옌낌 씨는 공산화된 베트남을 탈출해 ‘보트 피플’로 바다를 떠돌다 태국 수용소로 흘러들어 왔다. 당시 낌 씨는 임신 중이었고 이혼까지 한 상태였다.
1981년 낌 씨와 쌍둥이는 호주 퍼스로 가 새 삶을 시작했다. 3년 뒤에는 멜버른으로 이주했다. 1987년 낌 씨는 재혼했지만 의붓아버지가 쌍둥이에게 매질을 하는 바람에 다시 이혼했다. 이후 쌍둥이는 아버지 없이 어머니의 벌이로 힘겹게 생계를 꾸려 나갔다.
어릴 때 항상 붙어 다니던 쌍둥이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각기 다른 성향을 보였다. 반 씨는 점잖고 예의바르면서 책임감이 강했다. 반면 꼬아 씨는 반항기를 보이면서 비행을 저질렀다. 급기야 마약에까지 손을 대 3만 달러(약 3000만 원)의 마약 빚을 졌다.
반 씨도 행로가 순탄하지 못해 학비가 모자라 대학을 중퇴하고 친구와 벌였던 인터넷 사업도 1990년대 말에 망해 빚만 잔뜩 지고 말았다. 영업사원 일도 오래하지 못했다. 이러다 보니 성격마저 점차 비뚤어졌다.
2002년 중반 반 씨는 호주 마약조직으로부터 단숨에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제안을 받았다. 캄보디아에서 헤로인을 받아다 호주로 반입해 달라는 것이었다. 마약 빚에 몰려 있던 동생을 보다 못해 반 씨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반 씨는 캄보디아에서 받은 마약을 몸에 두른 채 싱가포르에서 비행기를 갈아타다 적발됐다. 하필 싱가포르는 마약사범에게 가혹한 형벌을 부과하기로 유명한 나라였다. 1999년 이후 마약 관련 범죄로 처형된 사람만 100명이 넘었다.
더구나 그가 지녔던 헤로인 약 400g은 싱가포르에서 사형을 언도하는 마약 기준량의 25배. 시중에 팔면 100만 달러를 벌 수 있는 분량이다. 싱가포르는 호주 정부의 막판 선처 요청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1일 리셴룽(李顯龍) 총리는 “사형 집행 결정을 변경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2일 오전 6시 사형 집행 시점에 호주 주요 도시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촛불집회를 벌였고 성당에서는 25차례 종이 울렸다. 미국에서도 사형 반대자들이 1일 저녁부터 롤리 교도소 밖에서 철야로 촛불집회를 갖고 당국의 사형 강행을 비난했다.
이 진 기자 lee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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