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홍권희]“바이 바이 브라우니”

  • 입력 2005년 9월 15일 03시 12분


코멘트
세계적 명성의 미국 연방재난관리청(FEMA)이 허리케인에 날아가 버렸다. 8월 29일 미국 뉴올리언스를 강타한 초대형 허리케인 카트리나에 FEMA가 처음 대응한 것은 그로부터 5시간 뒤였다. 당시 마이클 브라운 청장은 국토안보부 장관에게 이렇게 요청했다. “구조대원을 도와줄 자원봉사자 1000명을 48시간 이내에, 추가로 2000명을 7일 이내에 보내주기 바람. 카트리나는 거의 재해 수준임.” ‘제3세계’ 수준도 안 된다.

며칠 후 수천 명의 뉴올리언스 이재민이 식수와 식량 부족에 시달리는 상황이 TV로 전해졌다. 다음 날 기자들이 대책을 묻자 브라운 청장은 대답한다. “그런 일이 있는 줄 몰랐네요.” 이런 관리에게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브라우니(브라운의 애칭), 당신 일을 아주 많이 하고 있구먼”이라며 칭찬했다. 미국인들을 분노하게 하고 부끄럽게 만든 브라운 청장은 칭찬 후 열흘 만인 12일 사임해야 했다.

1979년 설립 이후 FEMA는 대통령 친구들의 놀이터였다. 경험과 능력을 갖춘 청장은 빌 클린턴 정부 시절 캘리포니아 노스리지 지진 등에 신속히 대응했던 제임스 리 위트뿐이었다. 부시 대통령은 자신의 선거참모와 그의 친구 브라운을 잇달아 청장에 기용했다. 카트리나가 덮쳤을 때 최고위 8자리 중 다섯 곳을 무경험 ‘낙하산’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의 등쌀에 진짜 전문가들은 조직을 떠난 뒤였다. 작년 6월 FEMA 직원노조 대표는 의회에 폭로편지를 보냈다. “재난관리를 전혀 모르는, 정치인과 결탁한 업자들이 고급 간부에 이어 중간 간부, 실무자 자리까지 다 먹었다. FEMA의 전문성은 사라졌다.”

국내에서도 과거 어느 때보다 경영 능력이 요구되는 공기업 경영진에 업무와 무관한 정치 주변 인물들을 기용한 데 대해 비판이 많다. “경험 없는 것이 오히려 장점”이라는 억지 방어 논리도 들린다. 조그만 태풍이라도 불어 닥치면 훌쩍 날아가 버리지 않을까 걱정된다.

대통령 친구의 친구 ‘브라우니’는 결국 FEMA의 명예와 함께 사라졌다. 문제들도 사라졌을까. 시스템 붕괴는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보자. 5일 침수지역 주민 구조를 위해 전국에서 모여든 소방대원 600여 명에게 FEMA 간부가 한가롭게도 성희롱 예방 교육 등을 했다. 소방관들이 “우린 사람을 구하러 왔다”며 현장 파견을 요구하자 그 간부는 “어허, 이젠 우리 명령을 따라야 해”라고 윽박질렀다. 소방관들은 호텔 생활에 지친 채 며칠 후 귀가했다.

FEMA가 이렇게 고장 난 채 미국 사상 최악의 재해를 맞은 것은 부시 행정부의 방침과 관계가 깊다. 테러 대책의 하나로 2003년 국토안보부로 편입된 FEMA는 자연재해보다 테러 대비를 더 중시하게 됐다. 올해 핵심 예산은 삭감됐고 뉴올리언스 제방 보강 재원도 턱없이 줄어들었다. 내년 국토안보부 예산 중 75%는 지방정부의 테러 대응에 쓰도록 꼬리표가 붙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다시 오지 않는다. 큰 피해를 낳은 이름은 다시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허리케인은 다른 이름표를 달고 찾아올 것이다. ‘제2의 카트리나’는 어디서든 만날 수 있다. FEMA가 수년 전 경고한 미국의 세 가지 재앙 중 남은 하나, 캘리포니아 대지진의 모습으로 올 수도 있다. 우리 주변에도 나타날 수 있다. 아니, 크고 작은 ‘한국형 카트리나’를 우리는 수없이 겪었고, 불행하게도 또 맞닥뜨릴 것이다.

홍권희 논설위원 konihong@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