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의 美國’…구호늑장에 흑인 분노 ‘인종 갈등’

  • 입력 2005년 9월 5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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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올리언스 외곽에 마련된 허리케인 카트리나 이재민 캠프에서는 ‘문명국 미국’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3일 오전 1시 40분. 흑인이 대부분인 이재민 2000여 명은 왕복 10차로 고속도로 위에 쓰레기 더미와 뒤섞여 누워 있었다. 구호식량을 먹고 내버린 음식 쓰레기에서 풍기는 쉰 막걸리 같은 냄새가 코를 찔렀다.

대부분은 간이침대나 궤짝, 종이상자를 아스팔트에 깔고 지친 몸을 추스르기 위해 잠을 청하고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을 밝히는 대형 조명 7, 8개와 발전기의 굉음 탓에 애초부터 깊은 잠을 자는 것은 불가능했다.

오전 3시. 잠 못 이루던 주민들이 낯선 동양의 기자를 붙들고 불쑥 음모론을 꺼냈다. “제방을 허리케인이 아니라 백인들이 일부러 폭파했다”는 것이다. 한 흑인 남성은 “친구 2명이 다이너마이트 폭발음을 들었다”고 말했다. 그의 여자친구인 요리사 티나 헤스턴(43) 씨는 “진절머리가 난다. 뉴올리언스를 떠날 것이다. 하지만 수사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고 거들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근거가 뭐냐”는 질문에는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오전 3시 45분. 2시간 넘게 현장 곳곳을 돌아다니는 동안 끊임없이 발에 걸리는 쓰레기를 바라보면서 ‘왜 닷새째가 됐는데도 치워지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흑인 주민들의 평소 생활습관 때문일까, 아니면 캠프 관리를 맡은 백인 관리들의 무신경 때문일까. 이런 장면이 TV에 나온다면 흑인에 대한 ‘편견’이 되살아날지도 모를 일이다.

세 아이를 둔 마이라 씨는 “빗자루를 좀 달라고 했지만 그것도 안 준다. 뒷짐 지고 서 있는 ‘저들’은 우리를 자존심 있는 인간으로 여기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다. “곧 떠날 텐데 왜 우리가 치우느냐”라고 하는 흑인 남성도 물론 있었다.

오전 5시. 예정된 시간을 4시간이나 넘겨 ‘비상 캠프용’ 버스 12대가 도착했다. 1대에 정원이 40명이면 500명 안팎이 냉방시설이 된 안식처를 갖게 될 것이다.

주민들이 버스 앞으로 몰렸다. 모두가 무기력해진 탓인지 의외로 몸싸움은 적었다. 하지만 누가 어떤 기준에 따라 먼저 타게 되는지, 원칙은 애초부터 없었고, 또 어디로 이동하는지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다. 경찰관 스콧 코코스 씨는 “그게…. 잘 모르겠다”며 난처해했다. 한 흑인 여성은 “당국이 하는 일은 틀려먹었다”며 고래고래 악을 썼다.

오전 6시. 멀리서 동이 터 왔다. 하지만 수용소는 어둠에 싸인 채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뉴올리언스의 도심은 대부분 물에 잠긴 채 텅 비어 있다. ‘재즈의 도시’에 루이 암스트롱의 애조 띤 트럼펫 소리도 사라졌다.

숙소로 돌아왔다. 칼럼니스트 모린 다우드 씨는 뉴욕타임스 3일자에서 미국을 ‘수치심 합중국(The United States of Shame)’이라고 묘사했다. 이재민들이 ‘쓰레기’가 돼 널브러져 있던 고속도로 수용소가 언뜻 떠올랐다.

뉴올리언스 이재민 캠프=김승련 특파원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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