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살아보니/날린 바후구나]영어만 쓴다고 국제화일까

  • 입력 2005년 2월 17일 18시 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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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한국의 인천국제공항에 내렸을 때 나는 영어 표지판을 보고 감탄했다. 물론 국제공항에서 영어가 병기된 안내 표지판을 보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여러 나라를 방문해 본 내 경험에 따르면 인천공항의 영어표지판은 그 설치 위치나 언어 사용의 정확성에서 세계 유수 공항들보다 훨씬 우수했다.

놀라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서울시내 상호나 간판에서 내가 읽을 수 없는 문자가 쓰인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오히려 내 고향인 뉴질랜드의 한인타운에서 더 많은 한국어 간판을 봤던 것 같다. 또 길거리를 지나는 사람 열 명 중 일곱은 영어 문구가 새겨진 옷과 장신구를 착용하고 있는 듯했다.

모든 한국인이 길거리의 영어 간판이나 옷에 새겨진 영어 문구를 다 이해할 수야 없고 이해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다른 나라 말로 쓰인 간판을 그리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다는 것 자체가 외국과의 문화소통에 익숙해져 가는 한국인의 정서를 보여주는 증거일 것이다.

한국인의 영어에 대한 관심은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 이런 영어 열풍이 한국의 국제화와 세계화를 대변해 준다고 할 수 있을까. 현실은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다. 무심코 지나쳤던 길거리의 간판이나 사람들의 옷에 쓰인 영어 문구 중에는 원어민인 나로서도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힘든 내용들이 많다. 철자법이 틀린 것은 그래도 양호한 편. 쳐다보기도 민망한 영어 문구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어린아이가 입은 티셔츠의 앞면에 새겨져 있다. 그저 패션이라 치부해 버리기에는 너무나 꺼림칙한 문구를 종종 본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보자. 요즘 외국 멋쟁이들 사이에는 일본어 중국어 한국어 등이 새겨진 옷이 유행이다. 얼마 전 회사 동료가 여가수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여줬다. 스피어스가 입고 있는 옷에 새겨진 한글 단어가 눈에 확 들어왔다. 국제적으로 유명한 브랜드의 옷에 ‘신흥 호남 향우회’라는 문구가 써 있는 것을 보고 사무실의 모든 사람들이 배꼽을 잡고 웃었다. 아마 많은 한국인들이 외국영화나 외국잡지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입은 옷에 해괴한 한자가 쓰인 것을 본 경험이 한두 번씩 있을 것이다.

한국의 간판과 옷에 쓰인, 이해할 수 없는 영어 문구들을 보면서 외국인들이 그냥 웃어넘길 수 있다면 그나마 최악의 상황은 아니다. 그러나 원어민들도 민망해 하는 비속어들이 쓰인 경우라면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외국어를 사용하고 있느냐가 국제화의 기준은 아닐 것이다. 얼마나 양질의 외국어를 얼마나 신중하게 사용하고 있느냐에 대해서도 한번쯤 돌아봐야 할 때다.

1973년 뉴질랜드 토랑가에서 태어났으며 언어교육학 석사다. 한국에서 13개월째 살고 있다.

날린 바후구나 옥스퍼드대 출판부 한국지사 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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