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노벨문학상' 쿠체의 삶과 문학

  • 입력 2003년 10월 3일 03시 3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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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작가 존 맥스웰 쿠체는 영미권 최대 문학상인 부커상을 두 차례나 수상하는 등 ‘노벨상을 제외한 굵직한 상은 모두 탔다’는 평을 들으며 매년 노벨 문학상 최상위 후보로 거론돼 왔다.

스웨덴 한림원은 “쿠체의 작품은 정교한 구성과 풍부한 화법으로 잔인한 인종주의와 서구 문명의 위선을 끊임없이 비판하고 진지하게 의심해 왔다”고 선정이유를 밝혔다.

남아공 작가로서 노벨상을 수상한 것은 두 번째로 1991년 네이딘 고디머 이후 12년 만의 일이다. 쿠체가 지닌 국제적 명성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독자층이 적었던 남아공 문학계도 그의 수상을 크게 환영하고 있다고 외신은 전했다. 선배 수상작가인 고디머는 쿠체의 수상 소식을 듣고 “그는 나의 좋은 친구며 위대한 작가다. 그가 두 번째로 이 상을 탄 것은 남아공의 영광”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이번 쿠체의 수상에 대해 심사위원들은 “쉬운 선택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스웨덴 한림원 종신위원인 호레이스 엥달은 “작품의 다양성과 고르게 높은 수준으로 볼 때 쿠체가 문학계에 끼친 공헌을 확신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1940년 남아공 케이프타운의 우스터에서 농장주의 아들로 태어난 쿠체는 부모로부터 아프리칸스어와 영어 등 2개 언어를 동시에 배우며 성장했다.

1964년 영국으로 이주한 그는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사회생활을 시작해 전 세계를 돌며 다양한 문화체험을 쌓았다. 언어학 연구로 방향을 전환해 69년 미국 텍사스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1971년 고국인 남아공으로 돌아간 뒤에도 뉴욕주립대(버펄로), 존스홉킨스대, 하버드대 등에서 문학과 어학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생활을 하며 창작에 몰두해왔다.

1974년 첫 작품 ‘더스크랜즈’로 문단에 데뷔한 그는 현실의 직접 고발에 비중을 둔 고디머와는 사뭇 다른 작품세계를 보여준다. 그의 작품에도 식민주의자와 피식민주의자, 지배자와 피지배자 등의 대립항이 설정된다. 하지만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 체제에서의 삶을 직접 묘사하는 것을 거부하며 남아공의 치욕스럽고 복잡다단한 현대사를 완곡한 방식으로 표현해 왔다.

그의 대표작이자 부커상 수상작인 ‘추락’ 역시 흑백갈등을 다루고 있지만, 주인공들의 내면 갈등 및 사회상의 간접적인 묘사를 통해 주제를 차츰 선명하게 떠올리는 기법을 드러내고 있다.

느린 성찰을 요구하는 작품들의 면모에서 드러나듯 그는 감정을 겉으로 좀처럼 표현하지 않는 조용한 성품으로 알려져 있다. 심지어 두 차례의 부커상 시상식에도 불참해 노벨상 시상식에도 참석하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그의 이름조차도 ‘존 맥스웰 쿠체’ ‘존 마이클 쿠체’ 등으로 엇갈려 심지어 ‘존 미스터리 쿠체’라는 별명이 생겼을 정도다.

그와 절친한 남아공 작가 라이언 메일런은 “쿠체는 거의 사제(司祭)와 같이 자기를 단련하며 창작에 헌신한다. 흡연이나 음주, 육식도 하지 않으며, 매일 자전거를 탄 뒤 아침마다 집필용 책상에 단정히 앉는 사람이다”라고 전했다.

1984년 남아공 케이프타운대 교수로 취임한 그는 지난해 정년퇴직한 뒤 호주의 애들레이드로 이주해 생활해 왔으며 올 가을학기부터 미국 시카고대에서 플라톤과 시인 월트 휘트먼을 강의하고 있다. 첫 부인인 필리파와는 1980년대에 헤어졌으며 1남1녀 중 아들은 사고로 사망했다.

국내에 출간된 그의 작품으로는 대표작인 ‘추락’(동아일보사)과 ‘야만인을 기다리며’(들녘), ‘페테르부르크의 대가’(책세상) 등이 있다.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쿠체의 작품세계▼

쿠체는 남아공 작가들 가운데 예외적인 작품 세계를 보여 왔다. 그는 억압받는 정치적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리기보다는 그 이데올로기의 실체와 허상을 포스트모더니즘 방식으로 해체했다는 평을 얻어왔다.

남아공 전역에 비상사태가 선포된 지 2년 후인 1987년에 작가가 한 이야기는 그의 정체성을 잘 보여준다.

“소설과 역사가 같은 풀밭 위에서 풀을 뜯으며 각자의 할 일만 하는… 현재와 같은 이데올로기적 압력 밑에서는, 소설은 ‘보조적인 역할’ 혹은 ‘경쟁’이라는 두 가지 선택의 길 외에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당시는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이 흑인들의 해방투쟁에 극단적인 폭력으로 맞섰던 시기로, 그만큼 작가의 현실참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그러나 쿠체는 “소설이란 천편일률적으로 현실을 재단해서는 안 되고, 자체의 패러다임과 신화를 전개해야 하며, 어쩌면 역사의 신화적 상태를 보여주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쿠체는 보다 자유로운 담론의 공간이 필요했고, 그런 그에게 남아공은 분명 숨 막히는 곳이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의 작품세계는 이런 편협한 공간을 자양분으로 구축됐다. 쿠체는 아파르트헤이트 이데올로기, 그와 관련된 남아공의 현실을 하나의 ‘변종’으로서가 아니라 ‘식민주의-후기식민주의-신식민주의’에서 흔히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으로 인식했다.

‘더스크랜즈’에서 시작해 ‘마이클 K’를 거쳐 ‘추락’에 이르는 쿠체의 소설들이 모두 우의(알레고리)적인 형태를 띠고 서구의 담론 즉 페미니즘, 후기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콜로니얼리즘 등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은 이러한 인식론에 바탕을 둔다.

쿠체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주는 소설 ‘페테르부르크의 대가’는 대가(도스토예프스키)가 아들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파헤쳐가는 내용으로 아들의 자살이란 작가의 개인적인 삶의 편력이 투영된 듯 보인다.

쿠체에게 소설은 ‘사유의 한 방식’이다. 그는 단문 중심의 현재형 내러티브를 즐겨 사용한다. 부조리한 현실을 그리는 가운데 깊은 사유와 해석을 담아내 난해하다는 평도 자주 듣는다. 네이딘 고디머는 쿠체에 대해 “종달새처럼 날아올라 매처럼 내려다보는 상상력을 가진 작가”라고 평한 바 있다.

조이영기자 lycho@donga.com

▼대표작 '추락' 줄거리▼

흑인에게 정권이 이양된 남아공. 주인공 데이비드 루리는 50대 백인 교수로 이혼남이다. 욕망으로 가득 차 있으나 열정은 부족한 인물. 대학에서 낭만주의 시를 강의해 오던 그는 여제자 멜라니와 충동적인 관계를 갖는다.

대학 진상조사위원회에 소환된 그는 제자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인정하지만 공개적으로 회개하라는 압력에는 굴복하지 않는다. 결국 학교를 사직하고 흑인지역에 사는 딸 루시의 작은 농장에 은거한다.

그곳에서 그는 동물보호소의 개를 보살피며 평화로운 전원생활에 젖어든다. 불협화음투성이인 삶에서 벗어난 듯하던 그의 평화는 곧 깨어진다. 그와 루시가 흑인 강도에게 폭행을 당한 것. 분노하는 그와 달리 루시는 흑인사회에 머무는 대가로 받아들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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