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리 "여전한 미소-위트…난 아직도 그를 사모한다"

  • 입력 2003년 6월 10일 06시 4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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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리 클린턴 뉴욕주 상원의원
힐러리 클린턴 뉴욕주 상원의원
《힐러리 클린턴 미국 상원 의원은 9일(현지시간) 미국에서 발매되기 시작한 자서전 ‘살아있는 역사(Living History)’를 통해 자신이 살아온 인생 역정을 처음으로 소개했다. 자서전에는 시카고 교외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예일대 법대를 졸업하고, 퍼스트레이디를 거쳐 정치적으로 홀로서기까지의 과정이 상세하게 묘사돼 있다. 그는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재직시 ‘공동 대통령’이라는 세평대로 외교에서부터 복지정책 그리고 내각 인선에 관여한 사실도 털어놓았다. 본보는 원본 전문을 입수해 주요 내용을 발췌, 소개한다.》

▼정치에 눈 뜬 당찬 소녀…여대생▼

▽청소년기=1960년 가을 존 F 케네디가 대선에서 리처드 닉슨 부통령을 물리치고 승리해 아버지를 경악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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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친구와 함께 부정투표를 밝혀내기 위한 공화당의 자원봉사자 대열에 합류했다. 13세 때의 일이다. 부정선거라는 아버지의 주장을 입증할 증거를 찾아 의기양양하게 돌아온 나에게 아버지는 혼자 대도시로 나갔다며 펄펄 뛰었다. 그러나 부모님은 한번도 “계집애는 이런 일을 할 수 없어”라고 얘기하지 않았다. 이런 부모 밑에서 자란 것은 큰 행운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했지만 떨어졌다. 상대 후보는 “여학생들이 학생회장으로 뽑힐 수 있다고 믿는다면 바보”라고 헐뜯었다. 우리 반에는 민주당 지지자가 단 한 명이었다. 선생님은 1964년 대통령후보 모의 토론회 시간에 그 친구에게는 공화당 의원 역을, 나에게는 민주당 출신 존슨 대통령 역을 맡겼다. 나는 심한 모욕감을 느꼈지만 도서관에서 민주당 강령과 백악관 성명 등을 읽으며 진정한 열정으로 민주당의 정책을 지지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대학시절=매들린 올브라이트가 다닐 때만 해도 웰즐리 여대생들은 남편감을 찾는 데 열중했다. 그러나 학생운동이 한창일 때였던 60년대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고 자신의 능력을 맘껏 발휘할 기회를 찾는 것이 화두였다. 더욱이 웰즐리는 남학생이 없어서 모든 과외활동을 적극적으로 꾸려갈 수 있었다. 나는 1학년 때 ‘공화청년회’ 회장으로 뽑혔지만 민권과 베트남 정책을 둘러싸고 회의가 커졌다. 동부 기득권 계층의 앞잡이로 생각했던 뉴욕 타임스 등을 읽으며 나는 옛날부터 갖고 있던 생각들이 날마다 시험대로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3학년 때인 1968년 4월 마틴 루터 킹 박사가 암살됐다. 나는 보스턴 우체국 광장에서 열린 대규모 항의 행진에 참가했다. 두 달 뒤엔 로버트 케네디 상원 의원이 또 암살됐다. 나는 미국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해 더욱 깊은 절망감에 빠져들었다.

같은 해 나는 워싱턴에서 의원 인턴을 지내다 공화당 전당대회를 경험했다. 존 록펠러 의원을 도와 주는 일을 맡았는데 리처드 닉슨에게 밀릴 것이 분명해 보였다. 공화당 내에서 보수적 이데올로기가 온건한 이데올로기를 누르고 확고한 우위를 다지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내가 공화당을 떠났다기보다 공화당이 나를 떠났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정치인의 기질을 보이다=웰즐리 여대 졸업식에서 졸업생이 연설하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반대하는 학장에게 “비공식 졸업식을 따로 하겠다”고 협박해 관철했다. 학생회장으로서 나는 연단에 서서 “이 대학에서, 사회에서 한 세대에 만연한 정서를 전달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고백하고 “두려움은 늘 우리와 함께 있지만 우리는 두려워할 시간이 없다”고 끝을 맺었다.

이 연설로 시카고 지역방송의 인터뷰에 출연했고 ‘라이프’지 특집기사의 모델이 됐다.

▼빌 클린턴과 미운 정 고운 정▼


(사진 왼쪽부터)1993년 퍼스트레이디에…/1998년 클린턴과 함께 춤을…/1998년 르윈스키 악몽 딛고…/2001년 상원의원 취임…새로운 도전

▽첫 만남=“그뿐인 줄 알아?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큰 수박도 키워.”

빌 클린턴을 예일대 법대에서 처음 봤을 때 그는 여러 학생들을 모아놓고 신나게 떠들고 있었다. “누구냐”고 친구에게 물었다. “응. 쟤, 아칸소 출신인데 아칸소 얘기밖에 안 해.”

우리가 본격적으로 만나기 시작한 것은 이듬해인 1971년 봄이었다. 나는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빌은 지나칠 정도로 나를 흘끔거렸다. 내가 그에게 다가갔다. “네가 쳐다보면 나도 계속 쳐다볼 거야. 통성명이나 하자. 나는 힐러리 로댐이야.”

수강신청을 하러 교무과에 가는데 빌이 자기도 교무과에 가는 길이라며 따라왔다. 교무과 직원이 빌에게 “웬일이에요. 수강신청은 벌써 했잖아요”라고 면박을 줬다. 첫 데이트는 그렇게 시작됐다.

나는 남자친구가 있었다. 그런데 일요일 저녁 빌이 전화를 했고 나는 감기에 걸려 있었다. 30분쯤 뒤 닭고기 수프와 오렌지주스를 든 빌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아프리카 정치에서부터 컨트리 음악까지 막힘없이 얘기했다. 그날 이후 우리는 하나가 됐다.

1973년 봄 빌과 유럽 여행을 했다. 잉글랜드의 아름다운 에너데일 호수에서 그가 청혼했다. “아니, 지금은 안돼.” 빌을 사랑했지만 미래에 대해선 전혀 확신이 없었다. 특히 부모의 이혼으로 외로운 시절을 보낸 어머니가 떠올랐다. 평생 지속될 결혼을 하고 싶었다. 내가 빌의 ‘사계절’을 견뎌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여러 차례 청혼을 거절당한 빌은 “결심이 서면 말해 줘”라고 말했다. 아칸소의 붉은 벽돌집 거실에서 결혼식을 올린 것은 그로부터 2년 반이 지나서였다.

▽내 사랑 ‘미스터 프레지던트’=대통령 첫 임기 동안 빌의 머리는 거의 완전히 하얗게 세었지만 그는 여전히 내가 25년 전 사랑에 빠졌던 소년 같은 미소와 날카로운 위트, 긍정적 사고를 잃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그가 방에 들어오면 환하게 웃고, 그의 잘 생긴 얼굴을 여전히 사모한다. 우리는 공공서비스의 중요성에 대해 변치 않는 믿음을 공유했고, 서로가장 좋은 친구였다. 우리에게 문제가 있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서로 웃게 만들었다. 나는 그것이 우리를 백악관에서 4년을 더 지내게 한 힘이라고 확신한다.

▽부적절한 관계=98년 8월 빌이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공개적으로 시인하기 직전까지 나는 빌을 철저히 믿고 있었다. 빌이 대배심에 나가 증언하기 사흘 전 나는 이렇게 말했다. “남편은 결점을 가지고 있는 인간임에는 분명해. 하지만 나한테 거짓말은 절대 안 해.”

그러나 다음날 아침 나는 침대 머리맡에서 “(르윈스키와의 사이에) ‘부적절한 친밀함’이 있었다고 증언해야 할 것 같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내가 빌에게 “(딸) 첼시에게 사실을 알려 주라”고 말하자 그의 두 눈은 눈물로 그렁그렁해졌다. 두 사람 모두에게 끔찍한 시간이었다.빌은 대배심에서 증언을 마친 뒤 오후 10시로 예정된 대국민연설을 준비했다. 빌은 혼돈에 차 있었다. 마침내 내가 말했다. “빌, 이건 당신의 연설이야. 이런 혼돈으로 당신을 끌고 간 건 바로 당신 스스로야. 오직 당신 자신만이 무얼 말할지 결정할 수 있어.”

정리=권순택 워싱턴특파원 maypole@donga.com

홍권희 뉴욕특파원 konihong@donga.com

▼백악관 비화▼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 천거=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은 내가 발굴했다. 빌이 매들린에 대해 물어 봤을 때 나는 그가 어느 누구보다 빌의 정책을 지지하며 핵심 문제에 대해 논리정연하고 설득력이 있다고 말했다.

▽뉴트 깅리치와의 악연=깅리치 하원 의장과 95년 11월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의 장례식에 함께 갔다. 지미 카터, 조지 부시 전 대통령도 함께 대통령 전용기를 탔기 때문에 깅리치 의장에게는 비행기 뒤쪽의 좌석이 제공됐다. 그는 뒤에 나에게 “당신이 25시간 비행기를 탔는데 내내 아무도 말을 걸지 않다가 마지막에서야 ‘뒤쪽 램프로 내리라’고 했다면, 도대체 예의범절이 있는 건지 의심하지 않겠어요”라고 말했다. 그 뒤 그는 타협이 불가능한 예산안을 제출해 연방정부의 기능을 엿새 동안 정지시켰다. 그는 의료개혁에 반대했지만 자신이 매달 내는 보험료 400달러 중 75%는 정부가 내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미 의회의 클린턴 대통령 탄핵 재판=의회의 탄핵 표결이 있던 날 나는 우리가 그토록 소중히 간직해 온 미국의 법치주의가 ‘의회주의를 빙자한 쿠데타 시도’에 의해 유린되는 현실에 대해 슬픔을 억제할 수 없었다.

▽렌퀴스트 대법원장의 불길한 예언=나는 (대통령) 선서식 때부터 느껴 왔던 우려를 씻어낼 수 없었다. 선서식 당시 윌리엄 렌퀴스트 대법원장은 우리에게 웃지도 않고 “행운을 빈다”고 말했다. 그의 말투는 우리에게 행운이 따르지 않으면 불행해질 것임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대법원이 2000년 대선에서 플로리다주 재검표를 중단시키고 조지 W 부시 후보의 손을 들어준 것은 국민의 선출권을 빼앗는 노골적인 권력 남용이다.

▽염문설이 나돌던 빈스 포스터와의 관계=그는 (워싱턴의) 문화에 익숙하지 못했으며 비난을 있는 그대로 마음속 깊이 받아들였던 것 같다. 나는 죽는 그날까지 내가 왜 그와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그의 절망을 사전에 읽어내 힘을 주지 못했나하고 아쉬워할 것이다.

▽백악관에서 상원으로=99년 초 민주당 지도부는 뉴욕 주를 대표하는 상원 의원 선거에 출마해 줄 것을 강력히 종용했다. 하지만 더 많은 정치적 상처를 입을 수 있었고 빌의 대리 의원이라는 말을 듣기 싫어 망설였다. 99년 2월 12일 빌에 대한 상원의 탄핵 평결이 있던 날 오랜 친구인 해롤드 이케스와 몇 시간 동안 출마 여부를 검토했다. 출마 결심을 굳힌 결정적인 계기는 3월 여성 스포츠 선수를 격려하기 위한 TV 프로그램에 참석했을 때 한 소녀야구팀 감독의 속삭임이었다. “클린턴 여사, 경쟁을 두려워하지 마세요(Dare to compete, Mrs. Clinton).”

뉴욕=홍권희특파원 koni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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