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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3년 4월 18일 19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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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전 이 총은 120달러에 거래되었지만 10일경 3달러까지 떨어졌다. 그러나 약탈이 시작되자 재산을 가진 시민들이 너도나도 총을 찾으면서 18일에는 33달러까지 치솟았다.
개전 후 탈영한 공화국수비대 대원 칼리드 파룩(28·사진). 그의 집 거실에는 소총과 탄창이 수북했다. 탄알만 모두 3000발. 바그다드가 위험해진 것은 사담 후세인 잔당의 저항도 남아있지만 민간인이 쉽게 총을 쥐게 된 것도 중요한 원인이다. 취재진은 이라크 최정예라는 공화국수비대의 실체를 파룩씨를 통해 알아보기로 했다.
그는 2000년까지 바그다드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교수와 다툰 뒤 졸업을 못하는 바람에 중등학교 졸업자 신분이 돼 2002년부터 2년 복무 예정으로 입대했다. 이라크는 학력이 높을수록 의무복무 기간이 줄어들어 박사의 경우 45일만 근무하면 된다.
―공화국수비대의 용맹은 어느 정도인가.
“초록색 휘장을 두른 수비대가 최강이다. 박격포를 한 팔에 싸안고 포탄을 끼워 넣는 병사도 있을 정도다. 정규군보다 2배나 훈련을 받지만 대우가 좋다. 하지만 전쟁 전엔 월급이 자주 나오지 않았다.”
―당신 군복에는 빨간색 휘장이 둘러져 있다. 군 생활은 어땠나?
“고통스러웠다. 새벽 5시 반에 기상해 점호를 받았다. 철저하게 검사 받고 하나라도 못 챙기면 얼차려를 받았다. 턱수염이 조금이라도 자라면 사포(砂布)로 문질러 버렸다. 체력훈련이라며 가로 세로 2m짜리 참호를 파게 했다. 다 파고 나면 다른 장교가 다시 덮으라고 말했다. 음식은 형편없었다. 25명이 닭고기 한 마리를 나눠먹은 적도 있다.”
―전쟁 당시 상황을 설명해 달라.
“내 부대는 쿠트에 주둔했지만 지뢰제거반인 나는 바그다드에 파견됐다. 개전 후 1주일 뒤쯤 복귀명령이 떨어졌다. 고심 끝에 탈영했다.”
―왜 그랬나.
“아프가니스탄에 가본 적이 있는가. 그곳 군인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다. ‘더 나은 미래’라는 명분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겐 명분이 없었다. 후세인이 지면 우리는 더 풍부한 음식과 급료를 받을 수도 있다. 미군에 구식 무기로 맞서 목숨을 버릴 이유가 없다.”
―다른 병사들도 당신과 비슷한 생각이었나.
“같은 부대의 내 친구는 목숨을 걸고 싸웠다. 그는 쿠트에서 미군 탱크 50대를 저지하라는 명령을 받아 대전차포를 쏘았는데 미군 탱크가 끄떡없었다. 두 번째 대전차포를 캐터필러에 명중시켰는데도 멀쩡해 지휘관을 찾았더니 이미 전사했다고 한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도망가는 것뿐이었다.”
―미군을 지지하는가.
“그렇지 않다. 미군은 어쨌거나 침략군이다. 기회만 생기면 미군을 죽일 것이다. 다른 이라크인들의 생각도 마찬가지다.”
김성규기자 kims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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