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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1년 10월 14일 18시 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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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의 15일 방한을 앞두고 직원들이 시설을 점검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 고이즈미 총리의 방문코스로 잡혔기 때문.
98년 처음 문을 연 역사관은 일제가 독립투사 등 항일세력을 감금하고 처형하기 위해 1908년 세운 ‘경성감옥’을 재정비한 것. 한일 양국의 ‘껄끄러운’ 과거사가 고스란히 녹아 있는 곳이다. 새 천년을 맞아 동반자적 한일관계의 새 지평이 열리고 있지만 서대문형무소에 맺힌 상처는 아직 씻겨지지 않은 것일까. 일본 총리를 맞게 될 역사관에 구청, 경찰, 대사관 직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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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관의 한 직원은 “사나흘 전부터 보안점검은 물론 잡초 정리, 청소 등으로 제때 퇴근해본 적이 없어요”라고 말했다.
외국 수반을 맞을 채비로 땀방울을 흘리고 있는 이들도 일본 총리를 맞는 ‘개인적인’ 소감을 묻는 질문에는 대부분 얼굴을 찡그렸다.
“솔직히 달갑지는 않지요. 최근까지 일본이 보여준 태도가 너무 얄밉잖아요.”
아직까지 총리 일행의 동선(動線)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반 전시실, 사형장, 추모비 등 상징적인 시설물만 거쳐갈 가능성이 높다고 직원들은 예측했다.
서대문구의 한 관계자는 “일본 대사관측에서 잔혹한 고문 장면 등 ‘자극적인’ 전시물이 몰려 있는 곳을 총리의 관람코스에서 빼고 싶다는 뜻을 전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귀띔했다.
최근 들어 역사관을 찾는 관람객들도 일본정부에 대해 노골적인 ‘거부감’을 보이고 있다.
단적인 예가 관람객들이 화장실 벽에 한 낙서. 한 야외 여자화장실 벽에는 ‘일본, 너무 무식하다’ ‘죽고 싶냐’ 등 비난조의 낙서가 이곳 저곳에 휘갈겨져 있었다.
청소직원 임경엽씨(61)는 “평소 어쩌다 1개씩 발견되던 낙서가 일본 총리 방한 발표 이후 화장실당 10건 이상 발견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역사관을 찾은 관람객들은 야스쿠니 신사 참배, 역사교과서 왜곡 파동, 남쿠릴 열도 수역의 한국 어선 꽁치조업 금지 등의 외교적 마찰을 거론하며 한결같이 비판적 목소리를 냈다.
유충근씨(72·인천 연수구 동춘동)는 “정부가 일본과의 ‘외교전’에 계속 밀리는 것 같아 답답하다”며 “잠깐 들러 생색내기식 ‘유감’ 표명만 할 바에야 차라리 오지 않는 편이 낫다”고 말했다. 이진희양(15·동명여중 3년)도 “과거 역사에 대한 진정한 사과 없이 이 곳에 발을 들여놓는다면 독립투사들의 넋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미 방한이 성사된 이상 이를 기회로 삼아 교훈을 주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없지 않았다.
남지연씨(20·동국대 지리교육과 2년)는 “고문, 처형 장면 등 생생한 잔혹행위들을 낱낱이 보여주어 ‘역사의 진실’과 함께 한민족의 분노를 느끼게 해 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현진기자>brigh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