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희선생 처형 사유는 소설 '만주 빨치산' 때문"

  • 입력 2000년 4월 25일 19시 49분


1928년 소련으로 망명해 극동에서 독립운동을 한 문인 조명희(趙明熙)선생이 38년 소련 비밀경찰에 체포돼 4년 뒤 처형된 이유는 대하 유작소설 ‘만주 빨치산’ 때문이라고 유족들이 주장했다.

장남 미하일(한국명 조선인·67), 차남 발로다(65) 등 유족들은 24일 부친이 체포될 당시 김일성부대 등 20∼30년대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활동하던 항일 빨치산을 소재로 한 ‘만주 빨치산’의 초고(草稿)를 마친 상태였으며 이 소설이 소련당국을 자극해 죽음에 이르게 됐다고 공개했다.

미하일은 91년 구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의 부친 처형 기록을 조회한 결과 △체포 당시 부친이 공개된 장소인 하바로프스크작가동맹 건물에서 숙식하며 ‘만주 빨치산’을 집필하고 있었고 △이 소설을 쓰도록 권유하고 집필을 도왔던 강진태와 이를 러시아어로 번역했던 김 아파나시가 같은 사건으로 처형됐으며 △죄목이 ‘민족주의자’로 돼 있었다고 밝혔다.

당시 스탈린 정권은 민족주의를 소연방에 대한 가장 큰 적으로 꼽았으며 선생이 한인 항일운동을 소재로 한 소설을 쓴 것이 민족주의를 부추기는 것으로 판단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

유족들은 “50년대 말 북한작가 이기영이 소련을 방문했을 때 김일성도 이 소설의 행방에 대해 관심이 있다고 말했다”며 “김일성은 소설의 공개로 자신이 미화한 항일투쟁의 진상이 밝혀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고 전했다.

지금까지는 소련당국이 극동 한인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를 앞두고 반발을 막기 위해 민족지도자인 선생을 제거했다는 설이 유력했다.

선생은 스탈린 사후인 56년 복권됐으며 60년대 그의 선집(選集)이 한글과 러시아어로 나왔으나 ‘만주 빨치산’에 대해서는 알렉산드르 수투린 등 일부 연구자가 작품의 실존사실만 제기했었다.

유족들은 당시 압수당한 초고는 KGB 후신인 연방보안부(FSB) 문서보관소에 보관돼 있을 것이라며 반환을 요청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만주 빨치산’의 초고가 발견되면 문학사뿐만 아니라 당시 독립운동사 연구에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모스크바〓김기현특파원>kimki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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