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마포구 망원한강공원 ‘마포인트나루’에 있는 무인 음식점 내부. 고객들이 범일산업 하우스쿡 라면 조리기 앞에 서 있다. 범일산업 제공
라면 조리기는 20여 년 전에 나왔지만 ‘한강라면’이 각인되기 시작한 것은 몇 년 되지 않는다. 이를 대중에게 더 친숙하게 만든 것이 전국 무인 라면점을 휩쓴 주방 가전업체 범일산업 하우스쿡 라면 조리기다. 독자적인 인덕션 코일 기술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과 K컬처라는 ‘날개’를 달았다. 한강라면이 한강을 벗어나게 만든 유레카 모멘트는 여기서 시작됐다.
2014년 말이었다. 인천 남동구 남동국가산업단지 범일산업 회의실에서 외부 자문역 컨설턴트와 연구팀원 몇 명, 그리고 신영석 대표(58)가 머리를 맞댔다. 범일산업은 주로 전기밥솥용 열판과 전자기유도가열(IH·인덕션 히팅) 코일을 일본 가전 대기업에 납품했다. 그런데 일본 측에서 인덕션 코일을 활용해 튀김기를 만들어 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한 것이다. 부품뿐 아니라 완제품 생산의 기회였다. 튀김기 장단점 등을 논의하다 한 팀원이 말했다. “인덕션 코일 기술이 있으니 라면 조리기도 검토해 보면 어떨까요.”
신 대표 머릿속이 번쩍했다. ‘이거다’ 싶었다. 부친이 일군 회사를 이어받은 경영 2세는 사업을 더 성장시켜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부품 산업의 한계를 느끼던 차였다. 완제품 생산이라는 어렴풋한 생각만 있었다. 그러려면 생소한 것은 할 수 없다. 갖고 있는 기술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라면 조리기는 매력적으로 보였다.
● ‘한강라면’은 분위기였지만…
라면은 집 밖에서는 주로 분식집에서 가스불 솟구치는 화구에 끓이는 것이 상례다. 그걸 전열기로 끓여 내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로 만든 것이 라면 조리기다. 업계에서는 1990년대 중후반에 처음 등장한 것으로 본다.
초기의 라면 조리기는 주로 하이라이트 전열기를 사용했다. 하이라이트는 전기를 넣으면 열선이 빨갛게 달궈지면서 가열되는 방식이다. 한 영세 업체에서 만들었는데 이후 다른 업체로 넘어가거나, 그 업체가 문을 닫는 등 곡절을 겪으며 내구성 같은 제품 검증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이 열선 방식 조리기가 서울 한강공원 몇몇 매점에 ‘즉석 끓인 라면’이라는 이름으로 설치돼 있었다. 2000년대 중반 이후에는 한강공원 매점과 휴게소를 대체한 일부 편의점에 몇 개씩 들어가 있었다.
상품이라고 할 만한 품질은 아니었다는 게 업계 중론이다. 저렴했지만 잔고장이 많고, 조리기 표면이 뜨거워 화상을 입을 우려도 컸다. 끓어 넘친 라면 국물이 눌어붙으면 잘 닦이지 않아 위생상 좋아 보이지 않았다. 전용 용기가 없어서 알루미늄박 그릇에 먹어야 했다. 결정적으로, 라면 맛이 그저 먹을 만했을 뿐 식당이나 집에서 끓여 먹는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럼에도 한강을 찾는 사람들 사이에 조금씩 입소문이 난 것은 한강의 독특한 분위기 덕이었다. 한강은 조깅이나 산책하러 온다든지 잔디밭에 돗자리를 펴거나 작은 텐트를 치고 휴식을 취하는 사람이 많다. 이 때문에 맛보다는 강을 보며 라면을 먹는다는 분위기를 중시한다. 당연히 지금의 ‘한강라면’이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의 대중성은 없었다. 다만 하이라이트에서 인덕션으로 조리기 방식이 전환되려는 조짐은 나타났다. 2015년에는 몇몇 조리기 업체가 범일산업에 인덕션 코일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신 대표는 라면 조리기 시장에 뛰어들어도 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라면은 한국인 거의 누구나 즐겨 먹기에 시장의 지속 가능성이 컸고, 품질이나 기능이 떨어지는 기존 조리기를 기술로 뛰어넘는 것은 상대적으로 어렵지 않겠다고 직감했다. 조사해 보니 해외에는 라면 조리기라는 것이 아예 없었다. 라면도 라면이지만 전체적으로 음식을 다룬다고 하면 시장이 더 커질 것 같았다. 더욱이 대기업이 진입하기에는 규모가 작지만, 그렇다고 토대가 빈약한 중소기업이 뛰어들기에는 기술이나 자금이 부담스러운 시장이라는 점도 나쁘지 않았다. 신 대표는 기술에 자신이 있었다. ● 물을 빨리 끓여 연속으로 조리하기
신영석 범일산업 대표가 19일 인천 남동구 남동국가산업단지 회사 개발실에서 라면 조리기로 끓인 라면을 먹어 보고 있다. 인천=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1980년 신 대표 부친 신평균 회장이 세운 범일산업은 전기 가열(히팅)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 기술로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사태가 벌어진 1998년 미쓰비시 산요 샤프 타이거 등 일본 6대 가전업체 가운데 4대 업체에 밥솥용 열판을 국내 최초로 수출했다. 이후 히팅 기술을 업그레이드해 인덕션 코일을 개발해 국내 유명 밥솥 제조업체에 납품했고 일본에도 수출했다. 현재 대기업 인덕션 제품에도 들어간다.
신 대표가 자사 하우스쿡(Hauscook) 브랜드 라면 조리기의 핵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물을 빨리 끓이는 기술이다. 음식은 무조건 센 불에 끓인다고 제맛이 나지는 않는다. 매운탕이 일정 시간을 끓여야 진국이 나오는 것처럼 라면도 마찬가지다. 어느 정도 넉넉히 끓여야 라면 본연의 맛이 난다. 하우스쿡 조리기에서 물 끓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40초. 다른 업체 것들은 대략 2분이다.
“대부분 라면 조리기는 조리 시간을 3분 50초∼4분으로 설정합니다. 라면 맛을 제대로 내려면 이 시간 상당 부분을 조리에 써야 하는데, 물 끓이느라 반 이상 쓰고 나머지 시간에 조리합니다. 그러다 보니 면발의 쫄깃함이나 제 국물 맛이 나오지 않는 거죠.”
이 회사 인덕션 코일의 에너지 효율은 90% 이상이다. 반면 국내 여러 업체에서 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OEM) 방식으로 중국에서 들여오는 인덕션 코일 효율은 70∼80%다. 같은 시간에 어느 것이 더 빨리 끓을지는 여기서 일단 판가름 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빨리만 끓여서도 충분하지 않다. 빨리, 오류 없이 연속적으로 작동하는 내구성이 있어야 한다. 신 대표는 “조리기 내구성을 검증하기 위해 라면을 5만 개 넘게 끓여 본 것 같다. 조리기 한 대를 24시간 풀(full)로(쉬지 않고) 가동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조리 시간을 4분으로 할 때 조리기 한 대당 하루에 대략 360개 라면을 끓일 수 있다. 이렇게 연속 사용하면서도 단 한 차례도 오류가 나지 않았다고 한다. 신 대표도 집에 가져가서 계속 테스트한 것은 물론이다.
1년여 연구개발 끝에 2016년 8월 첫 제품이 나오고, 이후 약 1년간 보완하고 2017년 본격적으로 시판에 돌입한 조리기의 기술적 측면에 대해 신 대표는 자신감이 넘친다. 다만 난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회사 연구팀원이 그동안 하지 않던 업무를 한다든지 여러 요인 때문에 그만두겠다고 한 적도 있다. 무엇보다 주변의 반대가 적지 않았다. 기존 부품 생산과 판로가 안착한 상태에서 경험도 없는 완제품을 할 이유가 뭐냐는 것이다. “개발하다가 망한다”는 얘기도 들었다. 2018년 판로 개척을 위해 서울 금천구 가산디지털단지 근처에 라면 조리기와 튀김기를 엮어 ‘라면에 빠지다’라는 매장을 열었을 때는 부친이 “왜 하지 않던 일을 하며 돈을 쓰느냐”면서 앓아눕기도 했다. 한참 설득해야만 했다. 품질과 기술로는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는다고 믿는 조리기가 빛을 본 데에는 두 가지 외부 요인이 작용했다.
● 코로나19 팬데믹과 K컬처의 ‘힘’
최근 국내 매출 상위권에 드는 김밥 프랜차이즈 본사에서 전국의 무인 라면점을 자체 조사한 적이 있다고 한다. 좀 더 스마트한 매장을 쉽게 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증가 추세인 무인 라면점을 벤치마킹 대상으로 삼았다. 그런데 이 회사 관계자가 신 대표에게 “다녀 볼 수 있는 라면점은 다 둘러봤는데 설치된 조리기의 95%가 하우스쿡이더라”고 말했다.
라면 조리기를 본격 출시한 직후 국내외 바이어들과 상담해 보니 반응이 썩 좋았다. 판로가 쉽게 열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급격한 변화는 신 대표로서는 예측할 수 없는 ‘사건’에서 비롯됐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 전과 후를 비교하면 극과 극입니다.”
팬데믹 이전에는 자영업자나 바이어들이 라면 조리기에 관심은 있었지만 도입 여부를 고민했다면, 팬데믹 이후 경제 전반이 어려워지면서 기존 틀로는 매출을 내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조리기 판매가 급증했다. 무인 라면점도 마찬가지다.
K팝 대유행에 힘입은 K푸드 약진과 높아지는 K컬처 위상도 한몫했다. 외국인 관광객 버킷리스트에 ‘한강에서 라면 먹기’가 빠지지 않고, 심야나 새벽에 무인 라면점에서 외국인이 라면을 끓여 먹는 장면이 유튜브에 넘쳐 났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화룡점정이었다.
물론 라면 조리기는 아직 충분히 대중화하지 않았다. 한국 인구의 5%가 알까 말까 할 정도다. 그러나 해외 라면 시장이 커지면서 조리기 시장 또한 커지고 있다. 한국의 라면 수출 규모는 2015년부터 10년 연속 최대 기록을 갈아치우며 지난해 10억2000만 달러(약 1조4500억 원)를 기록했다. 올 상반기(1∼6월)에 7억3172만 달러(약 1조480억 원) 수출을 올려 1조 원을 일찌감치 넘었다.
하우스쿡은 미국을 비롯해 50개국에 수출하고 있다. 신 대표는 고물가에 시달리는 미국 시장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하우스쿡 조리기를 몇 대 설치한 미 텍사스주 한 식당에서는 하루 라면이 600그릇 팔린다고 한다. 고객도 백인이나 중남미계 미국인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중국산 조리기가 나오고 있지만 내구성이 검증되지 않아 당분간 국산을 넘어서기는 어렵다고 신 대표는 본다. 다만 K푸드는 중시하지만 ‘K조리기’는 등한시하는 것 같아 속이 쓰리다. 지난달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에서 이재명 대통령 부인 김혜경 여사가 한강라면 시식 행사했을 때 쓰인 조리기는 중국산이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라면만으로는 생명력이 짧을 수밖에 없다고 신 대표는 생각한다. 라면은 라면대로 계속 가되 다른 K푸드에도 활용하고 나아가서는 현지 음식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그의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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