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병오년 새해는 ‘붉은 말(赤馬)’의 해다. 말은 거침없는 활력과 에너지의 상징이다. 새해 말의 기운을 가장 잘 받을 수 있는 곳은 어딜까? 서울에는 말죽거리, 역삼동, 역촌동, 구파발 등 역참이 있던 곳에는 말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그런가하면 종로에는 피맛골이 있고, 광화문 앞에는 삼봉 정도전의 집 마구간 자리에 이마(利馬)빌딩이 세워져 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서울에서 말과 인연이 깊은 동네는 요즘 가장 핫한 성수동과 뚝섬이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몰려다니는 이 곳은 원래말들이 맘껏 뛰어놀던 무대였다. 새해를 맞아 중랑천과 한강이 만나는 뚝섬과 살곶이벌판을 찾아 말처럼 도약하고 질주하는 생명력의 기운을 얻어보자.
● 말(馬)이 달렸던 연무장길
성수동 연무장길은 ‘팝업(Pop-up) 스토어의 성지’다. 이 곳을 찾는 젊은이들은 대림창고와 어니언에서 커피를 마시고, 소금빵을 사기 위해 줄을 서고, 젠틀몬스터와 탬버린즈에서 패션 선글라스를 끼어보고, 사진을 찍으며 하루를 보낸다.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디올 성수 앞에는 틱톡 영상을 촬영하며 춤을 추는 외국인 관광객들로 가득 차 있다.
아차산 보루에서 바라본 구리, 하남 방면 한강의 야경.
매주 새로운 패션, F&B, 게임 기업의 팝업스토어가 열리고, 공짜로 이벤트를 즐길 수 있는 팝업이 끊임없이 또 생겨나기 때문에 돈 없어도 데이트하기 좋은 곳이 바로 연무장길이다. 이 곳은 원래 수제화 공장과 자동차 정비소, 금속 가공공장이 즐비했던 준공업지대. 내년 봄부터 가을까지 서울숲과 성수동 골목길 곳곳에서 K팝을 테마로 한 국제정원박람회까지 열린다고 하니, 그야말로 성수동은 ‘한국의 브루클린’으로 불릴 정도로 상전벽해했다.
그런데 성수동 연무장길이 조선시대에는 군사 훈련장이었다는 걸 상상할 수 있을까. 한강과 중랑천이 만나는 뚝섬의 허허벌판. 이른바 ‘살곶이벌’로 불리는 이 곳에서 기병들이 마상 무예를 하며 활을 쏘고, 보병들이 진법을 훈련하는 함성으로 가득 찼던 곳이다. 논산에 육군훈련소가 있는 연무대(鍊武臺)가 있던 것 처럼, 성수동에도 군사들이 무예를 닦던 연무장(演武場)이 있었다.
연무장의 흔적을 찾아보려면 성덕정길로 가봐야 한다. 뚝도정수장과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 트리마제 사이에 있는 길이다. 성덕정(聖德亭)은 왕이 군사 훈련을 검열하는 ‘열무(閱武)’ 행사에 참관할 때 지휘소로 사용하던 정자였다. 현재 성덕정 터(현재 천주교 성수동 성당)에 정자는 남아 있지 않지만, 수백년 수령의 거대한 느티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왕의 쉼터에 넉넉한 그늘을 드리워주던 나무였다. 왕이 군사훈련에 참관할 때는 ‘뚝기(纛旗·대장기)’를 세웠는데, 여기서 ‘뚝섬’이라는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뚝섬경마장이 있던 역사를 추억하는 서울숲 군마상.이번엔 발길을 서울숲으로 옮겨본다. 기수들이 말을 타고 질주하는 군마상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살아 있는 말이 뛰는 듯 생생한 조각상이다. 뚝섬에서 말이 달렸던 것은 조선시대 뿐 아니다. 1954년부터 1989년까지 뚝섬에 경마장이 있었다. 뚝섬경마장은 2005년 서울숲으로 바뀌었다. 이제는 경주마가 달리던 트랙 위로 시민들이 걸어 다닌다. 서울숲을 한 바퀴 도는 원형 산책길은 바로 트랙의 흔적을 그대로 남겨두고 조성했기 때문이다.
서울숲 군마상을 보니 10여 년 전 몽골 초원에서 말을 타본 기억이 떠올랐다. 오랜시간 뚜벅뚜벅 걷다가 박차를 가하고, 채찍을 휘두르니 말이 두 발을 모았다 펴며 날아가듯 질주하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리고, 쾌감에 벅찬 가슴은 두근두근 뛴다. 한 번 말 위에 올라타서 달리기 시작하면 지구 끝까지 달려가고 싶은 욕망이 생겨난다. 그래서 몽골 고원의 칭기즈칸도 세상 끝까지 정복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 살곶이다리
서울숲에서 나와 한양대 옆 중랑천변에 가면 살곶이 다리를 만난다. 태조 이성계가 함흥에서 돌아와 태종 이방원을 만난 곳이 이 근처다. 야사에 따르면 형제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다섯째 아들 이방원에 대한 분이 덜 풀린 이성계는 화살을 날렸다. 태종은 슬쩍 피했고 화살은 미리 촘촘히 세워둔 천막 기둥에 꽂혔다. 그래서 ‘화살이 꽂힌 벌판’이라고 해서 살곶이벌로 불렸다고 한다.
조선을 건국할 때 한양의 도읍지를 물색하러 양주 회암사에서 온 무학대사도 살곶이 벌판을 통해 한양에 입성했다. 왕십리로 건너간 무학대사에게 한 노인이 “십리를 더 가면 진정한 명당이 나온다”는 말을 해주었다고 한다. “십 리(十里)를 더 가라(往)”는 노인의 말은 그대로 ‘왕십리(往十里)’라는 지명이 됐다.
한양대 옆 중랑천 하류에 놓여 있는 조선시대 가장 긴 돌다리였던 살곶이다리.실제로 살곶이다리를 찾아가 보니 그 크기가 놀라웠다. 길이 76m, 너비 6m의 이 다리는 말과 마차가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로마 제국이 건설한 ‘로마가도’를 연상케하는 건축물이다. 살곶이다리는 ‘제반교’라고 불렸다. 반석 위를 건너는 다리라는 뜻이다.
조선시대에 중랑천 하류에 왜 이런 육중한 돌다리를 놓았던 것일까.
살곶이다리는 경기도 광주, 이천을 거쳐 영남으로 가는 길과도 연결되는 동방의 대동맥이었다. 또한 중랑천변(현재 동부간선도로)을 따라 의정부, 포천, 철원을 거쳐 금강산, 함경도까지 가는 동서남북의 통행량이 압도적으로 많았던 중요한 길목이었다. 강원도에서 뗏목에 실려온 목재도, 충주에서 남한강 수운으로 실려온 물자들도 송파나루나 광나루에서 내려 살곶이다리를 넘어 한양으로 들어왔다.
북방과 남방의 외적들도 산으로 둘러싸인 한양에 입성하려면 반드시 서울에서 보기 드문 광활한 평야가 펼쳐진 살곶이 벌판을 통해야 했다. 그래서 국가에서는 살곶이벌에 말을 키우고, 군사훈련을 펼쳤다. 조선시대 말은 오늘날의 자동차와 장갑차를 합친 것과 같은 최고의 기동 전력이자 운송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은 살곶이벌에 가장 긴 돌다리를 세웠던 것이다.
그래서 살곶이벌에는 조선 초기부터 말을 키우던 국영 목장이었던 ‘살곶이 목장’이 있었다.
중랑천변의 마장동(馬場洞)은 국가의 말을 관리하던 관청인 사복시의 목장이 있었다. 현재는 축산물시장이 들어서 있다. 마장동 축산물시장에 들러 소고기국밥을 한 그릇하고 용마산 노을 산행으로 새해를 준비해보기로 했다.
● 용마산에서 바라본 살곶이벌의 붉은 해
용마산 정상에서 내려다본 살곶이 벌판. 중랑천이 뚝섬에서 한강을 만나는 드넓은 벌판에는 조선시대 말들이 뛰놀았던 목장과 군사 훈련장이 있었다.오후 3시쯤 광진구 아차산역에서 산행을 시작했다. 한강변의 야트막한 아차산(295m)은 동네 뒷산 오르듯 편하게 오를 수 있다. 아차산 정상으로 향할수록 고구려가 쌓았던 보루 유적지가 이어진다. 보루에 올라서면 잠실벌의 롯데타워와 종합운동장, 강남 아파트 단지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왼쪽으로 눈을 돌리면 남양주와 광주에서 흘러온 한강의 푸른 물결이 구리, 하남을 지나 광나루와 송파나루로 밀려든다. 아차산은 한강의 지배권을 놓고 싸웠던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치열한 각축전의 현장이었다.
능선을 타고 30분 정도 더 가다 보니 용마산(348m) 정상에 도착했다. 수락산, 도봉산, 백운대부터 북한산, 인왕산, 안산, 남산, 관악산, 잠실벌까지 180도 넘게 서울 시내의 전경을 광활하게 조망할 수 있는 최고의 포인트다. 특히 해 질 녘에 오니 한강 너머로 붉게 물드는 장관이 펼쳐졌다. N서울타워가 우뚝 솟아 있는 남산을 보니 케이팝데몬헌터스에서 귀마와 사자보이즈, 헌트릭스가 최후의 대결을 펼쳤던 장면도 떠오른다.
용마산은 말의 전설이 깃든 산이다. 용마(龍馬)는 ‘용의 비늘’이 온몸에 덮인 신성한 말이다. 경주 천마총에서 발견된 ’천마도(天馬圖)‘처럼 하늘을 날아다닌다. 용마산 아래의 면목동(面牧洞)은 조선시대 궁중의 말을 키우던 목마장이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아차산 보루에서 바라본 구리, 하남 방면 한강의 야경.용마산에서 내려다본 드넓은 살곶이 벌판에는 중랑천이 굽이굽이 한강으로 흘러간다. 이제 해가 지고 아파트 단지에 하나둘씩 불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가로등은 오렌지빛을 뿜어내고, 동부간선도로에 늘어선 자동차의 후미등이 빨갛게 빛난다. 곳곳에 점멸하는 전광판의 광고도 선명하다. 미국 LA그리피스 천문대에서 바라봤던 로스앤젤레스의 별빛 야경보다 더 드라마틱한 서울의 밤 풍경이다.
경기가 어려운 연말이다. 생명력과 활력의 상징인 말은 늘 멈춰 있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기상 덕분에 새로운 일을 시작하거나 어려움을 돌파하려는 사람들에게 큰 에너지를 준다. 또한 가장 빠른 통신 수단이었던 말은 승전보 같은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존재이기도 했다. 새해를 맞아 다시 시작하려는 사람들이라면, 살곶이벌에 찾아가 봐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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